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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의 자연환경: 아라가야와 남강, 청동기 이전

백만번의습작

by 에이구몬 2021. 5. 5.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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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의 자연환경: 아라가야와 남강, 청동기 이전

 

목차


Ⅰ. 함안의 자연환경

Ⅱ. 함안과 아라가야

Ⅲ. 아라가야와 남강

Ⅳ. 함안의 선사유적

Ⅴ. 참고문헌



Ⅰ. 함안의 자연환경

  1. 함안군 개요

함안군(咸安郡)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중앙에 있는 이다.  동으로는 동으로는 창원, 서로는 진주시, 남쪽은 고성 북쪽은 남강과 낙동강을 경계로 의령, 창녕을 경계로 하고있다. 면적은 416.8㎢이며, 행정구역은 2개읍 8면 255개리이다. 현재 인구는 2020년 기준 64,182명이다. 함안군은 아라가야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함안군을 구성하는 가야읍과 칠원읍은 초기 철기시대 소국연맹체가 생길무렵, 각각 안야국과 칠포국의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 정치체들은 칠포국을 중심으로 병합되고 뒤이어 가야의 일원인 아라가야로 다시 합쳐진다.

 

  1. 함안의 자연환경 

경상남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남서로 여항산(770m)과 방어산(530m) 등 고봉을 이루고 북으로 남강과 낙동강이 흘러 남고북저의 지형이다. 남부에 해안산맥이 고성에서 김해까지 동서로 걸쳐 있어 대체로 지세가 험준한 산지를 이루며, 북부의 저지부와 남부의 고지로 양분되는 지형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지역이다. 남부에 여항산(餘航山, 744m)·봉화산(烽火山, 649m)·서북산(西北山, 739m)·천주산(天柱山, 640m)·미산령(嵋山嶺, 661m)·광려산(匡廬山, 720m)·방어산(防禦山, 530), 동부에 오봉산(五峰山, 528m)·작대산(爵隊山, 648m)·무릉산(武陵山, 556m), 중앙부에 자양산(紫陽山, 402m) 등이 남쪽과 동쪽에 잇달아 있고, 남쪽으로는 여항산(770m)과 북쪽의 방어산(530m)이 솟아 있어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형으로 물이 역류하여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함으로써 두 강의 연안에는 평야가 비교적 넓게 발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요 하천은 우리가 살펴볼 6세기 경에는 더 넓은 공간에 넓게 퍼져있었다는 다양한 연구가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선행연구를 따라 현재의 평야를 당시 강의 영역으로 비정하는 방식으로 연구할 예정이다. 

주요 하천으로는 영운천이 방어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다가 남강에 흘러들고, 석교천(石橋川)이 오봉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다 남강으로 흘러들고 있다. 중앙에서는 남부의 여항산·서북산 부근에서 발원한 검암천(儉巖川) 일명 함안천(咸安川)이 북류하며 함안·가야를 지나 낙동강에 흘러든다. 또한 동남부에서는 광려천(匡廬川)이 광로산에서 발원하여 길게 북류하며 칠원·칠서에서 서류하는 칠원천·운곡천·가연천 등을 합한 뒤, 대산면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며 하구에 큰 모래섬을 형성하고 있다. 

기후는 남부온대기후대에 속하며, 연평균기온 14.8℃, 1월 평균기온 4℃, 8월 평균기온 26.6℃이며, 연강수량은 1,497.2㎜이다(2007년 기준). 함안은 경상남도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두 강의 유역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사진.1] - 자연환경으로 본 아라가야의 추정영역

 

Ⅱ. 함안과 아라가야

  1. 함안과 아라가야의 관계

가야는 산맥과 하천등 자연지형에 의해 구분된 분지로 구성되어있다.  각각 소지역권은 독립된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며 발전하였고 이는 고인돌의 분포로 추정 할 수 있다. 현재 고인돌의 분포를 통해 유추하면 청동기 시대 군북, 가야, 칠원을 중심으로 3개의 정치 권역이 형성되었다. 군북,가야권은 일찍이 합쳐져 안야국이라는 단일 정치체로 성장하고, 칠원의 권역은 칠포국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가야시대에 들어와 안야국을 중심으로 칠포국이 합쳐져 하나로 통합되며 6가야의 하나인 아라가야(안라국)으로 성장하였다.

아라가야는 안야국의 정치체를 기반으로 군북과 칠포의 정치체를 흡수하며 성장하였다. 따라서 함안, 특히 현재의 함안군 가야읍은 아라가야의 중심지였다. 이 지방은 낙동강 서안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을 중심으로 함안에는 선사시대 고인돌 유적과 도항리, 말산리 고분군, 성산산성, 함안 읍성등 많은 유적이 산재하고 있다. 특히 도항리, 말산리 고분군에는 아라가야의 실체를 보여주는 많은 고분들이 발굴조사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성산산성의 목간이다. 성산산성에서는 고대 명문목간이 출토되어 아라가야와 신라의 관계를 규명할 중요유물이 발굴되었다. 특히 아라가야에서는 특유의 특징을 가진 공자형고배, 화염형투창고배등 특유의 도질토기문화가 발달했다. 이러한 특징적 유물도 발굴조사 결과 출토 되었다. 또한 말갑옷이 완연히 출토된 마갑총도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에서 소재하고있다.

 

  1. 안야국

안야국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삼국사기》·《삼국유사》·「광개토왕비 廣開土王碑」에는 아시라(阿尸良)·아나(阿那)·아라(阿羅)·안라(安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석묘군이 분포되어 있는 함안군 내의 군북면·가야면 등지에는 청동기시대 이래 독자적인 정치집단들이 다수 형성되어 있었으나 이들이 안야국으로 통합, 발전되는 시기나 문화배경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안야국은 변한 소국들 중에서도 신지(臣智)가 ‘안야척지(安耶踧支)’라는 우호(優號)를 칭할 정도로 유력한 세력을 가진 소국이었으며, 인근 변한 소국을 통합하여 3, 4세기 이후 6세기 전반 신라에 병합되기까지 낙동강 지류인 남강 중하류 일대를 지배하는 아라가야국(阿羅加耶國)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가야읍에는 가야국시대의 거대한 고분유적들이 집중 분포되어 있어 당시의 강력한 세력규모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1] - 자연환경으로 본 가야읍(안야국)

  1. 칠포국

칠포국은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과 칠서면, 칠북면에 걸쳐있던 초기 국가시대의 소국이다. 함안군 광려천 주변에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군과 취락지등이 있으며 가야의 유적들도 확인되고 있다. 특히 오곡리 유적(梧谷里遺蹟)은 이른 시기부터 칠원 지역에 정치 집단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광려천 주변 들판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좋은 여건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칠포국(漆浦國)은 칠원 지역의 농업 생산력과 낙동강 및 마산만을 이용한 인근 지역과의 교역을 통해 성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곡리 유적에 가야의 널무덤과 구덩식 돌덧널무덤, 돌방무덤이 있고 함안을 대표하는 화염문 투창 고배가 다량 부장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칠포국의 형성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에 따르면 3세기 포상팔국(浦上八國) 전쟁 기사에 칠포국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그 이전에 성립되었을 것이다. 다만 인근 골포국(骨浦國)[현 창원 분지 지역으로 추정]이나 창원 다호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 집단의 형성과 관련성을 생각해 볼 때 칠포국의 형성은 늦어도 기원후 2세기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칠포국이 두 차례 포상팔국 전쟁에 모두 참여하고 있는 점을 보면, 칠포국은 포상팔국 중에서도 유력한 정치 집단이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두 차례의 전쟁이 모두 실패로 끝남으로써 칠포국은 쇠퇴하게 되고, 5세기 이후부터는 현재 함안 가야 지역으로 비정되는 안라국[아라가야]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칠포국은 이후 아라가야의 정치체의 일원으로서 정체정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진.2] - 자연환경으로 본 칠원읍(칠포국)

 

  1. 아라가야

아라가야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전하는 변진 안야국을 기반으로 함안지역에서 성장하고 발전한 국가이다. 아나가야, 안라국, 아시라국등으로 불렸고 가야 전기부터 멸망할때 까지 함안지역 가야의 일원으로 남아있던 국가이다. 아라가야의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정치체가 완성되었다. 우선 가야읍 지역의 정치체는 안라권(가야읍)과 군북권의 세력이 연합하였고, 포상팔국의 일원이었던 칠원의 칠포국이 전쟁 이후 세력이 약화되며 이를 안야국에서 병합하면서 안야국은 김해 구야국과 더불어 주변 소국들을 이끄는 지역 맹주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아라가야가 칠원지역의 장악을 하게 되면서 이들은 진동만으로의 진출이 가능해졌고, 바다로의 직접적인 연결이 가능해지며 안라는 바다로 나갈 길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안라국은 지역연맹체 단계에서 고대국가의 성격을 띈 지역국가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안라국은 520~540년대에 걸쳐 가야 남부 제국의 실질적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 특히 아라가야의 국제적인 위상은 529년 왜, 안라, 백제, 신라가 함께했던 안라 고당회의에서 엿볼 수 있다. 이후 아라가야는 신라에 복속 되었다. 삼국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에 “법흥왕이 대병을 일으켜 아시랑국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함안군으로 삼았다” 라는 기록이 있어 신라 법흥왕때 멸망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550년대 안라에 대한 기록이 꾸준히 나오기 때문에 실제적 멸망은 법흥왕대 이후로 비정하기도 한다.

 

Ⅲ. 아라가야와 남강

  1. 남강의 발원

남강은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남덕유산에서 발원한다. 발원지는 참샘으로 불리우며 함안 남계천, 함안 위천으로 합류한다. 위천으로 합류하며 남강은 국가하천으로 바뀌며 함양과 산청을 지나 진주의 진양호로 합류한다. 진양호에서 출발한 물길은 다시 진주 시내를 가로질러 흘러간다. 진주를 떠난 남강 물길은 함안군을 관통하여 함안군 대산면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남강은 경상남도의 서부와 동부를 나누는 낙동강의 지류이자, 경상남도 서부의 젖줄이기도 하다. 남강은 옛부터 물길을 통한 교통로 역할을 하여 이 지역의 교역을 담당하였다. 지금까지도 열리고 있는 경상남도 서부의 5일장의 형태를 살펴보면 이 지역에서 남강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알 수 있다. 산청군의 단계장, 단성장, 덕상장등 9개 5일장 모두 남강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마찬가지로 남강으로 연결된 함양, 진주, 함안 모두 마찬가지로 남강의 물길을 따라 정기시가 발달해 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남강이 경상남도 서부지역의 젖줄이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 

[사진.3] - 남강의 발원지와 함안

  1. 아라가야의 교역

남강을 세력의 중심에 놓고 발전한 아라가야는 어떤 물품을 교역의 대상으로 삼았을까. 현재 발굴되는 유물을 기반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라가야는 교역을 통해 여러 생필품은 물론 위세품, 사치품, 무기, 토기등을 수출입하였다. 그 중 우리가 살펴볼 것은  유리세공품과 토기이다. 유리 세공품은 사회 지도층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사회 지도층만 소유할 수 있었던 사치품으로 추측된다. 토기 역시 아라가야만의 특이한 화염문토기가 발굴되고 있다. 이런 화염문 토기는 교역로를 따라 주변국으로 흘러들어가 발굴되고 있다. 이러한 발굴 양상은 아라가야가 어떤 주변국과 교역했는지 알게해준다.


(1) 유리구슬
우리가 살펴볼 유리구슬 유물은 교역의 산물로 여겨진다. 남강의 교역로를 통해서 아라가야로 유입된 유리구슬은 사회 지도층의 위세품으로 기능하였고, 고분에 껴묻거리로 묻히면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모든 유리제품이 교역을 통해 수입된것은 아니다. 다량의 구슬이 외부를 통해 유입되었지만, 유리는 재질적 특성상 일정 온도만 넘어가게 되면 재가공이 가능했기에, 어떤 형태로든 재가공 할 수 있었다. 한반도 각지에서 출토되는 유리 거푸집은 이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서울 풍납토성과 광주 선암동 유적에서 발굴된 유리거푸집 등이 출토되었다. 

우리는 아라가야의 주무대였던 함안에 주목하고자 한다. 함안에서 출토된 유리구슬들은 대부분이 도항리, 말산리에 분포되어 있고, 그외 묘사리, 오곡리, 윤외리등에 소수 분포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유리구슬의 출토지역과 그 양이 당대 권력구조와 상당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것을 의미한다. 즉 유리구슬이 많이 출토되는 지역은 권력이 집중된 지역이였다는 결론이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유리구슬이 아라가야의 고토인 함안에서 출토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양상이 함안 도항리, 말산리에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아라가야는 남강을 이용한 교역을 통해 다양한 물품을 교역하였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교역품 중에는 사회지도층을 위한 위세품인 유리세공품, 유리 구슬이 포함되었고 이는 고분에 껴묻거리로 들어가 수천년의 시간이 지난 후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 함안 도항리 유적

     20호 목곽묘 출토

     조성시기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

▲ 함안 말산리 유적

     1호 목곽묘, 15호 목곽묘

     출토

     조성시기는 5세기대

▲ 함안 오곡리 유적 

     6호 석곽묘 출토

     조성시기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


(2) 토기

가야토기는 출현시점을 3세기 후반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함안권의 아라가야 양식은 5세기 전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라가야 양식은  5~6세기 새롭게 정립된 대가야 양식, 소가야 양식과 함께 3대 지역양식 중의 하나로 아라가야, 대가야, 소가야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이다. 아라가야 토기는 화염문투창고배로 대표되는 신형식을 가진 특이성을 보이며, 아라가야의 역사성 및 문화성과 결부된 하나의 지역 양식을 보여준다. 

[사진.4] - 아라가야의 토기


특히 아라가야를 대표하는 토기인 불꽃무늬 굽구멍 토기[화염문 투창 토기]는 5세기대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유행한 전형적인 아라가야 토기이다. 굽구멍 형태가 불꽃의 무늬를 닮은 이 토기는 아라가야 양식이 등장하는 4세기에 처음 등장하여 6세기 전반까지 아라가야와 그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이런 화염무늬가 들어간 토기의 종류에는 굽다리 접시, 그릇 받침, 굽다리 항아리등이 있으며 모두 그릇 다리 중간 부분에 화염형태의 굽구명이 표현되어 있다.

[사진.5] - 아라가야의 토기(불꽃무늬 굽다리 접시)

 

이런 아라가야의 토기는 자신만의 특수한 양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아라가야의 교역을 엿볼 수 있다. 아라가야는 토기 생산을 위한 토기가마를 현재의 법수면 일대에 설치하였다. 이 토기 생산유적일대는 산과 맞닿아 있어 토기 소성에 필요한 연료인 나무를 수급받기 용이 하였고, 또한 남강과도 가까워 토기를 수출할 물길까지도 확보한 요지였다. 현재 발굴된 가마유적 분포도를 활용하면 더욱 이해가 쉬워진다. 

[사진.6] - 아라가야의 토기 생산유적

 

위와 같은 가마유적의 분포를 통해 아라가야가 토기 역시도 교역의 대상품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실제로 아라가야와 교역을 진행한 주변국에서 화염무늬 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고령, 사천, 김해등 한반도 지방에서 아라가야 토기가 다양하게 출토되고 있다. 또 불꽃무늬 토기가 발견된 곳은 일본 긴키지방이다. 5세기 전반에 아라가야는 왜 긴키지역과 직접적인 교섭이 증가한다. 아라가야 토기는 5세기 초부터 오사카부를 비롯해 교토부와 와카야마현에 폭 넓게 분포하고 5세기 전반에는 나라현으로 급속히 확산된다. 특히 나라현 카시하라 시에 집중되는것이 주목된다. 아라가야는 긴키지역 수장층 가운데 특별히 나라지역 수장층과 교섭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불꽃무늬 토기는 긴키지방 고분군에서 6점이 발견되어 왜와 아라가야의 교역에 대한 증거가 되어주고 있다.

 

 

Ⅳ. 함안의 선사유적

  1. 함안의 구석기 유적

함안의 남아있는 구석기 유적은 아쉽게도 그 수가 매우 적다. 함안지역에서 확인된 구석기 유적은 네곳이다. 용산리와 도항리에서 구석기의 일종인 몸돌이 발견되었고, 우거리에서는 다양한 구석기 몸돌이 발견되었다. 함안 시내인 가야읍 사내리에서도 소형의 양면 찌르개와 격지 ,몸돌등의 석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총 네군데의 구석기 유적지가 있지만 우리는 그 중에서 칠원읍 용산리 구석기 채집지와 법수면 우거리가 구석기에 집중하여 함안의 구석기 유적을 다루도록 하겠다. 용산리는 함안지역에서 최초로 구석기 유구가 발견된 곳이지만, 정식적인 채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로지 지표조사만 이루어진 채집지이다. 또한 우거리는 함안에서 최초로 구석기 유적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이므로 이 두 유적을 중점으로 함안의 구석기 유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용산리 구석기 채집지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용산리에 있는 구석기 시대 유물채집지는 용산리 427번지에 위치한다. 이곳은 구석기에서 삼국시대에 이르기 까지 여러시대의 유적이 분포하는 곳이다. 이렇게 여러 시대의 유적이 분포하는데에는 지형적 입지가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용산리 일대는 칠원천과 운서천이 광려천으로 합류하는 지점으로 유적이 입지하기에 알맞은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다. 이곳에서 채집된 구석이는 석영제로, 연대는 중기 구석기 시기에 해당한다. 

용산리 유적은 함안에서 최초로 구석이 유적이 채집된 곳이다. 이를 통해 남강유역, 함안지방에서 구석기 시대에도 인간이 생활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구석기 시대 중에서도 이른시기인 전기, 중기 유적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사진.7] - 용산리 구석기 유적 출토 몸돌석기

 

(2) 우거리 구석기 유적

경상남도 함안군 법수면 우거리 17번지에 위치하는 우거리 구석기 유적은 지형상은 함안천 남쪽의 약 3km거리의 구부렁골과 접한 비탈면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구석기 유적 일부가 발견되어 2009년 8월 26일부터 우리문화재연구원에서 한달간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용산리 유적에서는 몸돌 석기와 찍개, 긁개, 돌망치등 22점의 구석기 시대 석기가 확인되었다. 이 석기들은 주변 유적과의 비교를 통해 볼때 중기 구석기 시대의 성격을 지닌 것 으로 파악되었다. 우거리는 함안 지역에서 최초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구석기 유적으로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사진.8] - 함안의 구석기 유적

  1. 함안의 신석기 유적

함안지역에서 확인된 신석기 시대 유적은 가야읍 도항리 유적과 군북면 동촌리 유적 2곳이다. 두 곳 모두 토기편이 출토되어 이곳에서 신석기 시대 사람이 생활했음이 확인되었다.

(1) 도항리 신석기 유적

도항리 유적은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 106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함안 말이산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는데 고분군의 북쪽 평지에 신석기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도항리 유적에서 유구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지만,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토기편에서 눌러 그은 무늬인 압인문이 확인되었다. 유적의 형성 시기는 기원전 4000년 전후로 추정되며, 남강 유역권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시대 유적으로 고고학적 의미를 가진다.

(2) 동촌리 신석기 유적

동촌리 유적은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782번지 일원으로 남강으로 힐러드는 석교천 변의 충적지에 해당한다. 5점의 빗살무늬 토기조각이 지표에서 수습되었지만 이곳에서도 도항리 유적과 마찬가지로 유구가 확인되지는 않았다. 토기는 모두 도항리 유적의 예와 동일한 신석기 시대 전기의 것이다. 

[사진.9] - 함안의 신석기 유적

  1. 함안의 청동기 유적

청동기 시대에는 지금처럼 남강의 치수사업이 되어있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높고, 해안선이 내륙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따라서 지금의 지도를 두고 과거의 유적을 표시하는 것은 그 시간의 차이를 고려하지 못한 일이라고 할 수있다. 이부분에 있어 선행연구자 안성현 선생은 이러한 부분을 짚어 현재의 지도와 과거의 물길을 복원하였다. 이 지도를 통해 과거 아라가야의 청동기 유적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사진.10] - 아라가야 시기 함안지역 고대 교통로


(1) 고인돌 유적

함안지역에 언제부터 청동기 문화가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함안지역에만 170여기의 고인돌이 확인될 정도로 고인돌의 수가 많다. 고인돌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지역은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일대로서, 이들의 세력이 성장하여 삼한 시대에 소국을 형성하는 중심 집단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의 위치는 가야읍 광정리, 도항리를 대표로, 칠원읍에서는 예곡리 , 오곡리, 용정리로 볼 수 있다. 또한 군북면에서는 동촌리, 명관리 등의 고인돌 유적이 대표적이다. 고인돌의 분포로 추정할 때 함안의 서쪽인 군북면 동촌리의 고인돌은 안야국으로 성장하게 되는 기반 단계의 초기 정치체의 흔적이라 추정되며, 칠원읍의 오곡리, 용정리 에서 발견되는 고인돌 유적들은 칠포국으로 성장하게 될 정치체의 흔적이라 추정된다. 이러한 고인돌의 위치를 지도상에 표시하면 아래 사진과 같다. 

[사진.11] - 함안지역 고인돌의 분포 (현재)

그러나 위 지도는 현대의 지도이기에 청동기 시대의 물길을 재현하여 고인돌 위치를 재 조정할 필요가 있다. 위 지도에서는 대부분의 고인돌이 산 비탈에 위치하고 있는데, 살기 좋은 평야를 두고 왜 비탈에 거주하고, 고인돌을 세우는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안성현 선생의 남강 수위 데이터를 적용하면 현재의 지도에서 보이는 고인돌들이 주로 산간지역에 위치한 것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다.

[사진.12] - 함안지역 고인돌의 분포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 당시에는 남강의 물이 가야읍에서는 성산산성의 앞까지 물이 들어왔고 칠원읍에서는 구성리 앞까지 물이 들어왔다. 지금의 덕남리는 당시에는 섬이었을 것이다. 지대가 높은 일부분만 사람이 거주가 가능한 지형이었고, 배를 이용하여 이동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거주구역을 생각하면 왜 고인돌이 산간에만 분포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사라진다.

 

(2) 가야읍 도항리 고인돌 암각화 유적

함안 가야읍 도항리 고인돌 암각화 유적은 기원전 4~5세기 경의 고인돌과 6세기 전반경의 가야 고분이 서로 중복된 채 존재하는 아주 특이한 유적이다. 이 도항리 고인돌 암각화 유적을 통해 함안지역의 청동기 시대와 삼국시대를 동일 선상에서 파악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1991년에 암각화의 실체와 고분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국립 창원 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고분 아래에서 청동기 시대 고인돌 8기와 주거지 1동이 확인 되었다. 

고인돌 유적에서 눈여겨 볼 것은 암각화이다. 암각화는 선사인의 정신세계와 관련된 것으로 다양한 형태로 한반도에서 발견된다. 가야읍 도항리 고인돌의 암각화에는 겹고리무늬와 알구멍이 발견된다. 겹고리 무늬는 해, 태양, 눈 등으로 해석하고, 알구멍은 별 자리등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 고인돌 암각화를 통해 함안 지역 선사인들의 정신세계와 그 위로 겹친 고분을 통해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사진.13] - 가야읍 도항리 고인돌 암각화 무늬

 

 

Ⅴ. 참고문헌

  1. 단행본
    『가야연맹사』, 김태식,  1993, 일조각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2 - 가야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 김태식, 2002, 푸른역사
『가야자료총서 01-가야문헌사료편』,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8

『가야자료총서 03-가야발굴조사지료편1』,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8

『가야자료총서 04-가야발굴조사지료편2』,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8

『가야자료총서 05-가야발굴조사지료편3』,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8

『가야자료총서 06-가야발굴조사지료편4』,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8

『가야지역 출토유리 Ⅱ』, 국립김해박물관, 2020

『가야사총론1』, 가야고분군세계유산등재추진단, 2018

『경남의 선사문화』,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2014

『함안 마갑총』,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2002

『함안 도항리 고분군Ⅰ』,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1997

『함안 암각화고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1991

『함안지역 가야토기 생산유적 기초학술 연구』,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20

『함안 성산산성 발굴조사 보고서 Ⅴ』,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4

『아라가야 함안의 문화유산 제대로 알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08

『함안 황사리 고분군』, 경상대학교박물관, 1994

『도항리, 말산리 유적』, 경남고고학연구소, 2000

『도항리, 말산리 유적』, 경남고고학연구소, 2000

『함안지역 가야토기 생산유적 기초학술연구』,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20

 

  1. 논문

하승철,「유물을 통해 본 아라가야와 왜의 교섭」, 2018

안성현, 「함안지역 고대 교통로와 고대산성」, 2017

박준영, 「경남, 부산지역 유리구슬의 현황과 그 의미」, 2020

박승규, 「가야토기」, 『가야고분군 연구자료집 3권』, 2018

강동석, 「GIS를 이용한 가락국 「국읍」의 경관 분석과 해석」, 한국고고학보, 2019

강동석, 「남강상류 가야고분군의 입지와 분포 패턴」, 중앙고고연구, 2019

강동석, 「아라가야 국의 공간구조」, 『아라가야의 역사와 공간』, 도서출판 선인, 2018.

최경규, 「가야왕성의 공간구조와 경관」, 한국상고사학회, 2019

박천수, 「가야토기」, 2010

김지연, 「소가야양식 토기의 연구」, 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3

이종욱, 「한국 초기국가 형성과정의 소국」, 『한국상고사학보』2 7, 한국상고사학회, 1998

이희준, 「초기 진·변한에 대한 고고학적 논의」, 『진·변한사 연구』, 경상북도·계명대

한국학연구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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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제24회 가야사국제학술회의 발표자료집, 2018

임승빈, 『경관분석론』, 서울대학교출판부, 2018

전옥연, 「고고자료로 본 봉황동유적의 성격」, 『봉황동유적』, 제19회 가야사학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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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영상자료

함안 말이산 고분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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