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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차르 니콜라이 1세의 통치 (1825-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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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구몬 2022. 7. 22.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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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차르 니콜라이 1세의 통치 (1825-1855)

니콜라이 1세, Emperor Nicholas I

차르 니콜라이가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을 진압하며 제위에 올랐다. 전 차르이자 자신의 형 알렉산드르 1세와 니콜라이는 전혀 공통점이 없었다. 전임자는 심리적인 역설과 모순, 우유부단함을 보였지만 니콜라이는 그 반대였다. 결단력과 강한 의무감 그리고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언제나 군인적인 마음가짐을 가졌고, 군사훈련과 연병장 제복까지 모두 관여했다. 공학과 방어 건축물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별장을 지을때도 요새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공병이었고, 황제가 되자 전 국토를 요새화 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성 이사악 광장의 니콜라이 1세 기마상

그는 1796년에 태어났고, 나폴레옹에 대항한 전쟁과 보수주의가 강화되는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게다가 계몽주의가 쇠퇴하고 민족주의가 강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권력이 서구의 계몽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권위주의에서 나온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교육부 장관 우바로프 백작에의해서 “관제 국민성”이라고 불린 독트린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이론은 정교회, 전제정치, 국민성이라는 세가지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원칙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데카브리스트를 짓밟고 등극한 니콜라이는 혁명세력을 없어애 한다는 생각으로 임했기에, 그의 체제는 군국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 성격을 갖게되었다. 황제는 군인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공식적인 절차를 건너뛰고 밀사를 파견해 국무를 처리했다. 결국 원로원과 국무 협의회, 장관 협의회는 점점 힘을 잃었고 황제는 자신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특별 관료기구에 의존했다. 이들은 비밀리에 업무를 수행했고, 제국의 행정을 더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니콜라이는 특별 기구로 황제원을 운영했다. 

러시아 농노, 레핀강의 배를 끄는 사람들

니콜라이 1세 시기 러시아의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특히 농노제에 대한 한계점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그는 농노제가 야기하는 군대와 국가에 대한 손실을 알고 있었으나, 지주에게서 농노를 빼앗으면 귀족과 지주들이 헌법을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기존질서에 충격을 가하면 인민봉기가 일어날 것도 염려했다. 결국 정부는 기존의 전제정치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농노제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기는 헀지만 별로 이룬것은 없었다. 다만 일부 극단적인 학대행위만을 금지시켰을 따름이다. 황제는 전제정치를 유지하고, 농노제 폐지를 두려워했으며, 모든 대중적인 참여를 의심스러워 했다. 결국 개혁정치는 러시아에 도입될 수 없었다. 

게다가 1848년 이후 유럽의 혁명사태에 겁을 먹은 니콜라이는 완전히 반동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유럽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인의 해외여행을 금지하였고, 교사와 학생들이 타격을 받아야했다. 이러한 숨막히는 정치상태에서 러시아는 크림전쟁의 패배를 경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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