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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으로 본 '역사 앞에서' -피난과 가족애

정신분열초기/역사자료저장소

by 에이구몬 2020. 12. 20.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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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으로 본 '역사 앞에서'

 

  1. 머리말

  2. 피난가방에 대한 서사

  1. 보따리에 대한 서사

  2. 괴나리 봇짐에 대한 서사

  3. 고급가방에 대한 서사

  1. 결론

  1. 머리말
    6.25 전쟁은 한민족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전쟁을 시작한 북한이나, 예기치 못하게 침략을 당한 남한 모두 손실이 극심했다.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거니와 인적 손실은 더욱 극심했다. 3년간의 전쟁으로 한국군은 약 14만에 가까운 전사자와 부상자 45만명 이라는 심각한 인명피해를 보았다. 심지어 인명피해는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 민간인 피해현황은 사망, 납치, 학살, 부상등의 형태로 약 100만명에 가까웠다. 수많은 사람이 6.25 전쟁 속에 사라졌다. 민간인 피해가 군인의 피해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 이유를 전쟁의 원인이 ‘민족 내부의 이데올로기 대립’이라 본다. 즉, 점령지의 민간인이 어떠한 사상을 보이느냐에 따라 적이 될 수도, 아니면 훌륭한 국민 또는 인민이 될 수도 있었기에 적 정권 협력자 색출이 일어났다. 그로인한 상호 학살로 인해 많은 민간인 피해가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이데올로기 문제로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은 두 진영 모두 있었다. 남한에서는 보도연맹 학살, 북한에서는 황해도 봉기가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 모두 사상이 다르다면 민간인이라 하더라도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필자의 생각을 뒷바침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한 학살극을 보면서 피난을 준비했다. 물론 6.25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정부를 따라서 피난을 떠났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개전이 갑작스럽게 일어났고 피난길에 오른사람은 매우 적었다. 인민군의 남침과 동시에 이데올로기 대립에 따른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자, 민간인들은 생존을 위해 전선의 향방에 따라 피난을 가야만 했다. 이러한 피난민의 모습을 잘 묘사해낸 사료로는 『역사 앞에서가 있다. 사학자 김성칠의 일기를 엮어낸 이 책은 전쟁 당시의 모습을 한 개인의 눈으로 그려냈다. 그래서 타 자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피난을 가는 개인의 상황과 행색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특히, 필자는 행색묘사 중에서도 가방에 주목하고자한다. 『역사 앞에서1부에 해당하는 전쟁 이전의 서술에는 인물의 묘사에 가방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이후인 2부에서 부터는 인물 묘사에 가방종류에 대한 서술이 늘어난다. 이는 가방이라는 운반도구를 이용하여 짐을 싸고 이동해야하는 새로운 사회적 현상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본 글에서는 일기자료에서 나타나는 가방을 통해 당시 민간인들의 피난과 삶을 관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왜 삶의 터전을 버리고 피난을 가야만 했는지 사회상을 알아보고 피난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피난가방에 대한 서사

    1. 보따리에 대한 서사
      보따리는 한국 전쟁 당시 피난민들에게 흔하게 사용되던 가방이었다. 피난민들은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물건만 보따리에 넣어 머리에 지거나 손에 들고 피난길에 올랐다. 김성칠은 자신의 일기에 주변 인물이 피난을 떠나게 되는 상황과 행색을 자세하게 묘사해 두었다. 인민군의 서울입성은 너무나 빠르게 진행된 탓에 피난 가는 사람들에 대한 서술이 적었다. 하지만 9.28 서울 수복때에는 인민공화국 관계자들이 인민군을 따라 서울을 빠져 나갔다. 김성칠은 그들의 모습을 서술해 두었다. 김성칠이 서술한 보따리들을 따라가 보고 보따리가 전해주는 당시의 피난상황과  인물에 대해 살펴보자.

홍군은 법원내 당세포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받고 직업도 잃고 집도 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김성칠의 배려로 김성칠네 밭의 집에 들어와 살던 인물이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인민군이 쳐들어오자 형무소의 간수들은 모두 도망갔는데, 그 틈을 타 옥에서 나왔다. 그 이후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하자 홍군은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법원 자치위원회 위원장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지 2달이 채 되지 않은 9월 15일 인천에 연합군이 상륙했다. 이런 사실을 김성칠은 알지 못했지만 점점 가까이 울려오는 대포소리를 통해 인민군이 패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나마 모두가 알아차리던 시점이었다. 

“아내가 밭에 갔다 와서 홍씨 부인이 짐을 묶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 이사갈 모양인가 싶더라고. “설마 그럴 리야 있을라고,이사를 가려면 미리 말이 있을 테지” 하였으나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한 일이다.”(1950.09.21)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김성칠은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일하는 홍군이라면 급박하게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홍씨의 아내는 전쟁이 흘러가는 양상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남편이 인민공화국에 협력하고 있었으니 제때 피난하지 않는다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짐을 꾸리는부인을보고 “어디 이사를 가게 됩니까” 하고 아내가 물으니 “남편이 아직 아무말이 없으니 이사할 수는 없지만 어째 마음이 불안스러워서 그냥 가만히 앉아 배길 수가 있어야지요” (1950.09.21) 홍군은 아내에게 피난할 계획을 말하지 않았으나, 마음이 불안 했던 홍씨 부인은 보따리에 짐을 싸두었다. 홍군은 직장이 서울에 위치한 탓에 전선의 소식을 늦게 접했겠지만, 9월 21일은 인천에 상륙한 연합군이 김포를 점령하고 현재의 서대문구 연희고지에 당도한 시기이다. 아마도 홍군은 21일 오전까지는 인민군의 선전을 듣고 그 진의를 반신반의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겠지만, 오후에는 서울탈환작전을 실행하는 연합군의 소식을 듣고 곧바로 피난계획을 실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후엔 마침내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버리었다. 어디로 간다고도 밝히지 않고… 홍군은 끝내 나를 만나지 않고 가버렸다. (1950.09.21) 다행히 그의 아내는 불안하다며 짐을 묶어두었고 09월 21일 오후 곧바로 이사 하였다. 김성칠은 은혜를 베푼 자신을 만나지 않고 떠나가 버린 홍군을 못내 섭섭해 한다. 

홍군의 피난은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 필자는 여기에서 당장 내일을 모르는 전쟁터가 홍군과 같은 사람들의 삶에 연장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면서 관계하고 있던 수많은 이들과 인사조차 할 수 없이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마치 전쟁터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사의 삶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홍군은 인민공화국에 협력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홍씨 부인은 서울이 연합군에 의해 수복된다면 인민 공화국에 협력한 자신의 남편과 가족은 무사하지 못할 것을 직감한다. 그런 생각에 마음이 불안하여 미리 보따리로 짐을 싸두고 언제든 피난할 준비를 해두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삶을 마감할지 모르는 병사처럼 이 시기 서울 사람들은 내일을 두려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피난이라는 길 위의 삶을 택해야 했다. 홍군의 보따리는 인사조차 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당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급박함을 상징했다. 그렇다면 홍군의 사례와는 다른 형태의 보따리 서술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자.

낮에 복규가 웬 낯선 부인을 데리고 왔다. 이석씨의 부인이라는데 짐을 얼마 동안 맡아줄 수 없느냐는 의논이다. 나중에 혹시 동티나 나지 않을까 싶은 염려가 없지 않으나 무슨 물건이냐고 물으니 옷가지와 이불 보퉁이라기 그러마고 쾌히 승낙하였다. (1950.09.23) 이석은 의용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인민공화국의 서울 통치시절 극심한 식량난에도 ‘배급을 먹고남을 만치 타올’정도로 인민공화국에서 신임받는 실무자였다. 그렇기에 이석은 인민군이 북으로 패주할 때 다른 인민공화국 관계자들과 함께 급히 피난을 간다. 보아하매 상당한 신분과 지위를 가진 사람이 대부분인 것 같으나 꼬지 꿰듯 줄에 엮어서 강행군을(1950.09.23)해야만 하는 피난이 실시되자, 이석은 피난 직전 자신의 아내를 시켜 짐 일부를 김성칠의 집에 의탁한다. 김성칠은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어 내용물을 물어보기도 하지만 이불과 옷가지라는 말에  결국엔 짐을 받아준다.

이석의 짐은 무엇을 의미할까. 필자는 이석의 짐을 미련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든 급하게 피난을 해야하는 상황이라면, 그래서 짐을 많이 들 수 없었다면 짐을 버려야 한다. 정말 급했다면 이석은 굳이 지고 갈 짐이 아닌 이불과 옷가지를 보따리에 쌀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짐을 집에 버려둔 상태로 피난길에 올랐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석과 부인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불과 옷가지를 짐으로 꾸려 김성칠에게 의탁했다. 이석의 이런 행동은 언젠가 자신이 서울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미련에서 나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서울에서 물러나지만 언제든 다시 인민군과 함께 돌아오리란 생각으로 추측된다. 참으로 인민군 산하 의용군 책임자다운 생각이다. 

연합군과 인민군이 서울을 뺏고 빼앗기는 과정에서 서울 시민들의 목숨은 바람앞의 등불과도 같았다. 따라서 이석의 선택은 어떤면에서는 합리적으로 보인다. 우선은 생존을 위해서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인민군을 따라 피난을 갔다가, 서울이 수복되면 다시 맡겨둔 짐을 찾는다는 전략인 것이다. 실제로 1950년 9월 28일 수복된 서울은 다시 1951년 1월 인민군과 중공군에게 다시 점령당한다. 김성칠은 1950년말 부산을 향해 피난하여 이석이 맡겼던 짐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이석은 자신이 서울에 돌아올 때를 기약하며 서울에 보따리라는 미련을 남겨둔 채 북으로 피난을 떠났다. 우리는 이석의 보따리에서 서울을 두고 각축전을 벌였던 당시의 사회상과 피난민의 행동양상을 엿 볼 수 있다. 

이석이 서울에 미련을 남기고 북을 향했다면, 김성칠의 친우 김춘득은 희망을 찾아서 북한으로 올라갔다. 이는 홍군이나 이석의 피난 이유와는 조금 다르다. 김춘득은 앞서 살펴본 홍군, 이석과는 다르게 인민공화국에서 어떠한 직위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인민공화국에서 직위를 갖지 않았다고 해도 대한민국 정부에 호감을 갖고 있던것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일제의 가혹한 압제 밑에 신음해오다가 8.15 이후 큰 기대를 가졌던 것이 남조선의 문화정책이라는 것이 하도 빈곤하여 기대가 컸던만큼 실망도 컸었고,그 후 대한민국 정부가 선 후로도 이 실망은 한층 더해서 마침내 이남에 대한 반발심이 이북에 대한 동경으로 변했었고 거기다 또 이북의 활발한 선전공작이 주효하여 마음이 불그레해진 판에 이번 6, 25를 맞이했던 것이다.(1950.09.26) 김춘득은 남조선의 빈곤한 문화정책으로 인해 영화배우이자 예술인으로서 북한을 동경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후퇴하는 인민군을 쫓아 북으로 떠나며 중학 때 한방에서 뒹굴던 옛 친구(1950.09.26)김성칠에게 인사를 왔던 것이다. 김춘득은 대한민국 정부하에서는 영화라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김춘득을 오랫동안 지켜보던 김성칠 또한 그의 피난을 이해하는 서술을 보인다. 나는 오늘 저녁 한사람의 양심적인 예술가를 또 북으로 떠나보냄에 있어 그가 이 몇해 동안 병고와 생활난과 고문의 위협에 허덕이었음을 생각하고 이 땅의 문화정책이 너무나 빈약함을 통탄하여 마지 않는다.(1950.11.10)라는 김성칠의 서술처럼 김춘득은 좌익활동으로 고문을 받기도 했고 문화정책이 빈곤한 탓에 생활고를 겪기도 했으니 자신이 활동하기에 유리한 인민공화국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크낙한 보따리를 짊어지고 병약한 몸을 이끌고 수백리 산길을 ‘톺아서’ 가려는 것이다. 

김춘득의 피난은 앞서 살펴본 인물들과 같이 기본적으로는 생존을 위한 피난이다. 김성칠이 서술을 안 했을 뿐 좌익 행보를 보였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춘득의 피난에는 미래를 위한 선택이 내재되어 있다. 많은 예술인들이 김춘득과 같은 선택을 한다. 글줄이나 쓰고 그림폭이나 그리던 사람들,심지어 음악가. 영화인에 이르기까지 쓸 만한 사람이 많이 북으로 가버렸다.(1950.09.26) 김득춘은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출로써 불편한 몸을 이끌고 피난을 택했다. 김득춘의 보따리에는 생존을 넘어서서 이상향으로 가고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이를 통해서 대한민국 정부의 문화정책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예술인들에게 얼마나 혹독했는지도 엿 볼 수 있다. 

    1. 괴나리봇짐에 대한 서사

괴나리 봇짐은 보따리와 마찬가지로 대중적으로 쓰인 가방이다. 그러나 괴나리봇짐은 어깨에 메는 끈이 달려있어 지금의 백팩과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짐을 등 뒤로 메고 사용하면 양손이 자유로워진다. 피난민들은 등에는 봇짐을 메고 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피난길에 올랐다. 양손이 자유로워진다는 장점때문에 가방을 보급 받지 못한 군인들도 괴나리 봇짐을 이용했다. 이들은 총을 사용하기 위해 양손을 자유롭게 해야했다. 그래서 김성칠의 집에서 지내던 인민군은 보따리보다는 등에 메는 괴나리 봇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성칠은 이 봇짐에 대해 자세히 묘사해 두었다. 

“출동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라”는 전령이 왔다.(1950.09.20) 김성칠 집에서 며칠간 묵던 인민군 소대는 마포로의 출동명령을 받는다. 명령을 받은 소대는 이동 준비를 하는데 사병들은 총기와 통신기등을 점검하고 옷보따리를 둘러멘다. 그들에게는 배낭이라고 이름지을 만한 것이 없다. 가죽은 없더라도 베로라도 지어 썼으면 좋으련만 괴나리봇짐 그대로의 행색이다.(1950.09.26)라며 김성칠은 사병들이 둘러멘 봇짐을 보며 배낭을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한다. 

김성칠의 집에 머물던 인민군이 군용 가방이 아닌 봇짐을 쓰는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김성칠의 집에 머물고 있는 소대의 구성원들은 소대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강경에서 소집된 의용군이다. 군용가방 같은 고급물자는 의용군보다는 정규군에게 우선지급 되었을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인민군은 만성적인 물자부족에 시달렸다는 점이다. 인민군은 필요한 식량 및 탄약을 제때 보급 받지 못했는데, 이는 유엔군이 북한 지역에 있는 군수공장과 산업시설, 주요 수송망을 폭격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민군은 물자가 없어 의용군에게 군장같은 가방을 보급 할 수 없었다. 또 물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보급할 수송망이 없었다. 그래서 남한에서 징집된 의용군은 보급된 가방이 없어 김성칠 집에 묵던 소대원들 처럼 봇짐을 멜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봇짐을 메고서라도 챙겨야 할 물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인민군의 봇짐은 실질적인 군장의 역할을 하였으므로 약간의 식량과 식기, 삽, 옷가지등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물의 구성은 삽을 제외하곤 피난민의 짐 구성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민군과 피난민 둘 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도구와 식량을 짊어지고 생존을 위해 이동해야만 했다. 인민군도, 피난민도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길 위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김성칠의 집에 머물던 인민군 역시 길 위의 삶을 살던 이들이었다. 피난민이 전투를 피해 전선 반대편으로 이동할 때, 군인은 전선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김성칠 집에 머물던 인민군들도 생존을 위해 길 위에 서 있는 봇짐을 멘 사람들 중 하나였다. 비록 피난민과 향하는 방향은 달랐지만 봇짐을 맨 군인들 역시도 다른 형태의 피난을 통해 생존을 갈구하고 있었다.

    1. 고급가방에 대한 서사

연합군의 북진으로 서울은 9월 28일 수복되었다. 김성칠은 서울이 수복될 때 북으로 향하는 피난민을 묘사해왔다. 피난민들은 괴나리 봇짐과 보따리를 메고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이동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피난민 중에 왜 가방을 멘 피난민은 없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피난민들이 가방을 갖지 못했던 이유들 중 가장 큰 이유에는 전시상황이라는 점이 있다. 소대장 동무만은 훌륭한 사무용 가죽가방을 지니었는데 이는 분명히 노획품인 듯,신사복에나 어울릴 것이지 이를 들고 한만히 전장에 나다닐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1950.09.20)에서 볼 수 있듯이 정규 인민군인 소대장에게조차 제대로된 가방 보급이 안되는 현실에서 민간인인 피난민이 가방을 갖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 서술 했듯 물자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제대로 된 가방이 있었다 하더라도 전시상황이라는 특수 상황에서는 김성칠의 란도셀 처럼 군에 징발 당하였을 것이다. 대청 벽에 걸린 란도셀을 줄 수 없느냐는 것이다. 아내가 봉아를 붙들고 나중에 더 좋은 것을 사줄 테니 네 란도셀을 인민군 아저씨에게 주자고 타일러서 승낙을 얻었다. 소대장 동무,란도셀을 옆구리에 차고 거기다 종이랑 연필이랑 넣으면서 매우 기분이 좋으시다.(1950.09.28) 

두번째 이유는 경제적 이유이다. 당시 가방은 사치품이었다. 가방은 가죽과 나무등의 재료로 이루어진 일종의 공예품에 가까웠다. 따라서 고가의 사치품이었고, 서민들은 쉽게 소유 할 수 없었다. 전시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방이 사치품임임을 고려할때, 다수의 사람이 가방을 소유하기란 쉽지 않아보인다. 가방이 고가품이라는 점은 김성칠의 일기에서도 나타난다. 9.28 직전에 인민군 장교들이 여맹 사람들을 내세워서 보스톤 가방 한개와 쌀 한가마니씩 바꾸자고 하고 구하러 다니던 일이 생각난다.(1950.11.03) 이 내용에 따르면 가방은 장교들이나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서민들이 쉽사리 소유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당시 쌀 수급 상황을 고려한다면 가방에 쌀 한가마니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안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가방은 고가의 물품이었다. 하지만 김성칠은 중공군의 남하소식에 피난을 위하여 없는 재산을 털어서라도 가방을 구매한다. 

연합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직전, 인민군 장교들은 보스톤 가방 한개를 얻기 위해 쌀 한 가마니를 주면서 까지 가방을 구하러 다닌다. 인민군 장교들은 전선의 상황이 불리한 것을 알자마자 쌀 한가마니라는 비싼 값을 지불하고라도 피난을 위해서 보스턴 가방을 구매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고가의 가방을 김성칠도 구매하려 한다. 아리랑 고개에서 넝마로 나도 보스톤 가방을 한 개 샀다.(1950.11.03) 그리고 이 가방으로 피난을 가려 한다는 사실을 서술한다. 중공군 대부대가 압록강을 넘어섰다는 오늘, 나는 그들과 꼭 같은 심정으로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털어서 보스톤 가방을 사고 있다.(1950.11.03) 중공군 대부대가 압록강을 넘어서 서울을 향해 진격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김성칠은 ‘넉넉치 못한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피난가방을 구매한다. 이렇듯 피난과 가방의 이미지는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김성칠은 전쟁 초기에는 피난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피란! 피란한다면 이 손바닥만한 38이남에 어디는 안전한 곳이 있을 것 인가. 이 여름철에 어린 것들을 데리고 생활의 둥우리를 떠나서 어디메 살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인다.(1950.06.27) 자신의 직장과 집이 있는 서울에서 인민공화국 치하의 3개월을 버틴 것 또한 이러한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11월에는 갑자기 피난을 위해 비싼 보스턴 가방을 사는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김성칠의 행동이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9월 28일 연합군이 서울을 수복했다.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고생하던 김성칠은 3개월만에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에 돌아오자 김성칠은 떨어지는 포탄 속에서도 마을사람들의 얼굴에 한결 생기가 돌아 보임(1950.09.27)이라 서술하며 기뻐한다. 그러나 ‘부역자’(1950.10.15)라는 말과 함께 자수서 제출(1950.10.15)을 요구하는 대한민국 정부에 크게 실망하게 된다. ‘남하’란 말이 세도가 당당하게 씌어지고 있다.(1950.10.16)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의  발표를 믿고 직장과 가정을 ‘사수’(1950.10.16)한 사람들에게 부역자라는 꼬리표가 붙게 된다. 서울을 사수 하였고 그로 인해 ‘부역자’로 몰린 경험에서 김성칠은 피난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11월 03일 중공군 대부대가 압록강을 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피난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중공군을 포함한 인민군이 서울을 재점령한다면, 그들로부터 다시금 대한민국에 협력했다는 혐의를 받게 될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성칠은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보스턴 가방을 구매해 생존을 위한 피난준비를 시작했다. 

자신이 죽게되면 어린 자식들이 살아갈 길이 막막해진다는 가족애적 염려도 이 피난 결심에 한 몫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김성칠만 가진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서울시민들은 이번에 서울이 인민군에게 재점령 당한다면 인민군에 의해 부역자, 반동분자로 몰려 처형된 다는 것을 예상하고 피난길에 올랐다. 김성칠도 이 행렬에 참가하여 보스턴 가방을 들고 피난하였다. 김성칠의 보스턴 가방을 통해서는 북한과 남한, 상대 정권의 협력자 색출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서울의 암울한 시대상을 엿 볼 수 있다. 

 

  1. 결론

한국전쟁시기 가방과 피난은 매우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었다. 가방은 곧 삶을 위한 피난을 의미했다. 도시가 점령되면 점령군에 의해 목숨을 잃기 전 피난만이 삶을 유지할 유일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방은 삶을 이어줄 중요한 도구였다. 

그러나 피난은 생존을 위한 도박이었다. 가방과 피난을 통해 살게 되는 ‘길 위의 삶’은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매우 고되기 때문이다. 피난에는 보따리 하나 든 채로 직면하는 의식주의 문제는 당연하거니와 수 없이 많은 위험한 상황이 도사리고 있다. 곁에 있던 피난민이 갑작스럽게 강도로 돌변하여 공격 할 수도 있고, 적군의 기습에 무방비로 노출 될 수도 있다. 길 위에서 모든 종류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 되는 것이 바로 피난이다. 김성칠도 피난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며 피난을 떠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남겼다. 피란! 피란한다면 이 손바닥만한 38이남에 어디는 안전한 곳이 있을 것 인가. 이 여름철에 어린 것들을 데리고 생활의 둥우리를 떠나서 어디메 살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인다.(1950.06.27) 또 『열하일기』의 “조선사람은 걸핏하면 피란하길 좋아하지만 구태여 피란하려면 서울이 제일일 것이요” 구절을 인용하여 피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내비쳤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피난은 위험한 것이고 당시 사람들도 그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피난은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확신이 생겨야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앞서 살펴본 피난중인 인물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최소한의 짐만 챙긴 채 생존을 위해 길 위의 삶을 선택했다. 홍군과 그의 부인의 보따리에는 생존에 대한 불안함과 급박함이 담겨 있었다. 연합군이 현재의 서대문구 연희동까지 들어와 인민군과 전투를 벌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홍군은 가족을 데리고 김성칠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서둘러 피난길에 오른다. 홍군은 나를 만남이 도리어 나중에 나에게 불리하지나않을까 걱정해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1950.09.21)라며 김성칠은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만 많다면 자신의 아내를 보내어 김성칠 댁에 안부를 전할 수도 있었다. 급박했던 상황은 홍군에게 김성칠에게 잠깐 인사를 전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전쟁은 인사라는 사회적 약속 마저 절단내 버렸다.
또한 김춘득의 피난에서는 미래를 향한 희망을 찾아 볼 수 있다. 많은 예술인들은 대한민국 정부 아래에서는 자신의 꿈을 펼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인민공화국을 선택했다. 이들은 보따리에 더 나은 이상향이라는 희망을 넣어 북으로 향했다. 비록 죽음을 무릅 쓴 수백리의 길을 가야 하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욕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는 데에서 대한민국의 문화정책이 얼마나 예술가들에게 혹독했는지를 엿 볼 수 있다.

피난민에게 허용된 시간이 없는 것은 급히 피난했던 이석 또한 홍군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석은 자신의 보따리에 언젠가 서울에 다시 돌아올 것이란 미련을 남겨 아내를 통해 김성칠에게 맡겨 두었다. 이는 인민군 관계자다운 생각과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석은 인민군이 당장은 연합군에 밀려 서울에서 물러가지만,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서울을 ‘탈환’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울이라는 지역을 두고 연합군과 인민군이 서로 밀고 밀리는 당시 상황을 이석의 보따리를 통해 알 수 있다. 

서울을 사이에 두고 연합군과 인민군이 각축전을 벌이면서 재점령에 따른 부역자 색출이 벌어졌다. 이는 피난에 부정적이던 김성칠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고, 김성칠 또한 서울이 인민군에게 다시 점령되면 부역자로 몰려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해 피난을 선택한다. 김성칠이 구매한 보스턴 가방은 이러한 한국전쟁 시기 서울의 암울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가방이다. 

우리는 『역사 앞에서』의 가방묘사를 통해 이들이 왜 피난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상황과 그에 따른 사회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인물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가방들이 각기 내포한 의미는 조금씩 달랐으며, 그에 따라 가방을 통해 투사되는 사회상도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이 가방들에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바로 피난을 위한 도구라는 점이다. 피난민들은 피난을 통해 생존했다. 비록 피난의 과정이 험난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삶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 삶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피난을 통해 가족 모두를 살리고자 했던 모습에서 피난은 가족을 지키기 위한 행위이자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행위라 말할 수 있다. 김성칠이 서술한 피난가방들은 한국전쟁 시기 서울의 암울한 사회상을 보여주는 투사체이기도 하며, 진정한 가족애와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참고자료]

각주 06.  SGT Turnbull, 『Korean Refugees[인민군을 피해 철길을 따라 남하하는 피난민들]』,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950.06.28

 

각주 17.  CPL Dangel, 『South Korean Evacuees Move to the South to Escape the Invading North Korean Army[인민군의 남침을 피해 남하하는 남한 피난민들(1)]』,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950.07.07 

각주 18. PFC Alfred Ohtersen, 『North Korean Soldiers, Killed during the Forward Assault of the 23rd Inf Regt, 2nd Inf Div on the Naktong River Area, Lie along Roadway[낙동강 전투시 2보병사단 23보병연대의 진격 과정에서 사살된 인민군들의 시신]』,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950.09.16, 좌측 하단 시신 2구

 

각주 21. SGT Riley, 『A Dead North Korean Soldier Lies in Rice Paddie near Yongdok, Korea[짚단 위에서 숨진 인민군 시신, 영덕 부근]』,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950.07.29, 단독군장은 방탄모, 수통, 총기 등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을 몸에 결착시키는 것이다., 사진상 전사한 인민군은 단독군장 상태임에도 삽을 몸에 결착시켜 두었다. 이는 삽의 중요도가 총기만큼이나 높았음을 의미한다. 

 

 

각주 23.  CPL Ingram, 『[빨치산에게 살해당한 피난민들(1)]』,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95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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