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 표트르 대제의 후계와 죽음
[러시아사] - 표트르 대제의 후계와 죽음
러시아의 제국화를 이끌고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표트르 대제는 자신의 후계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의 후계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표트르 대제의 첫번째 아들인 알렉세이는 첫 부인인 예브도키야 사이에서 태어났다. 예브도키야는 표트르 대제의 모친이 선택해준 아내인데 개혁 반대파에 속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황제는 자신의 아들에게 쓸 시간이 별로 없었고, 자신의 아들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지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후광을 입고 반개혁파의 수장으로 표트르대제의 아들 알렉세이가 그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
1711년 표트르 대제는 아들 알렉세이를 독일의 공주와 결혼시키고 자신은 1812년에 마르타라는 농민의 여성과 두번째로 결혼하였다. 마르타는 정교회로 개종하여 예카테리나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 문맹의 농민 여성은 표트르 대제의 친구인 멘시코프의 집에서 지내다가 그곳에서 표트르 대제를 처음으로 만났는데, 그녀는 멘시코프의 아이를 낳고 그곳에서 살기도 했다. 그러나 표트르는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했고, 황제의 훌륭한 반려자가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황제처럼 술과 파티를 매우 즐겼으며, 황제는 그러한 황후를 맞이하여 그녀와 함께 군사 적전을 동행하기도 하고, 두번째 부인이지만 그녀를 합법적인 배우자이며 황후라고 선포했다.
황제가 예카테리나와 결혼하면서 지내는 사이 아들인 알렉세이는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할아버지와 같은 표트르였다. 손자 표트르를 낳은 알렉세이의 아내는 곧 사망했다. 이 무렵 표트르 대제는 자신의 후계에 대해서 자격을 운운하며 알렉세이게 경고했다. 이는 알렉세이가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지지하던지 또는 제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것을 종용하는 것이었다. 성격상 소극적이던 알렉세이는 자신이 황제가 되는 권리를 포기하였다. 1716년 알렉세이는 오스트리아로 도망하여 칼 6세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곧 모스크바의 회유에 의해 1718년에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는 반개혁파의 수장으로 낙인 찍혀 반역에 대한 죄를 추궁당했다. 1718년 여름 알렉세이는 심문도중 고문으로 인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서 세상을 떠났다. 표트르 대제의 아들인 알렉세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황제의 장자 알렉세이가 죽자 이제 황위를 이어 받을 사람은 황제의 손자이자 알렉세이의 아들인 손자 표트르, 그리고 예카테리나가 낳은 황제의 딸들과 황제의 이복형인 이반 5세 차르의 딸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내 예카테리나도 후계명단에 올라있었다. 표트르 대제는 1722년에 제위 계승법을 통과시키고 이에 따라 러시아제국의 황위가 계승되게끔 하였다. 이 법은 세습적인 연장자 원칙이 무시되고 군주가 후계자를 지명할 수 있다고 선포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표트르는 자신이 법을 만들고도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했다. 강했던 대제의 몸은 병과 불규칙한 생활로 허약해졌고, 결국은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한 채 표트르 대제는 1725년 2월 8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