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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3.1운동과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

에이구몬 2022. 3. 3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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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3.1운동과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

대동단결 선언

일제의 총과 칼을 앞세운 무단통치가 이어지고 있던 1917년 7월, 상해에서 신규식을 위시한 독립운동가들이 대동단결 선언을 발표한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움직임은 폭발적으로 늘어나 1918년 만주와 연해주 등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1919년 2얼에는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 등을 발표하였다. 날로 높아져가는 독립의 열망은 국내 종교계 대표들을 자극하였으며 결국 1919년 3.1운동으로 폭발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 등 각 도시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이 시위는 4월 말까지 국내 전체를 뒤흔들었으며, 나아가 해외로 번져나갔다. 미국에서는 독립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북간도 용정에서도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3.1 독립선언서

3.1운동은 처음에는 학생과 도시민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되었으나, 점차 지방으로 퍼져나가고 전국으로 확대대며 전 계층이 참여하는 운동이 되었다. 농민과 노동자가 함께 참여하면서  규모가 커지고, 진압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일본경찰에 맞서기도 했다. 동시에 3.1운동을 지지하며 동맹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제암리 학살사건

일제는 경찰과 헌병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려 하였다. 시위에 참여한 많은 한인들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마을을 통째로 태우거나 보복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는데, 수원 제암리의 경우 마을 주민을 교회로 모두 불러모아 놓고 교회를 불태우는 만행을 벌이기도 했다. 전국에서 일본군의 보복살해와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살인은 오히려 일본에대한 반감을 일으켰으며 결국 3.1운동은 탄압에 의해 마무리 되었지만 한인의 정신과 일본이 지금껏 고수해온 식민지 통치가 잘못되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사진

일제는 지금까지 해오던 무단통치 방식이 실패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했다. 육군 대장만이 할 수 있던 총독자리를 해군인 사이토 마코토가 맡은 것도 그 일종의 방안이었다. 해군이건 육군이건 결국은 일본 군인인데 무슨 차이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제의 이러한 반응과 더불어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의 결과와 나아가 운동을 지휘하고 통솔할 통합 지도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로 인해 한성, 블라디보스토크,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고, 위치는 상해에 두고 한성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 형태로 1919년 9월 상해에서 통합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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