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조선의 붕당 정치
[한국사] - 조선의 붕당 정치
조선은 위민 정치라는 성리학 이념아래 신진사대부를 기반으로 건국되었다. 그러나 조선 초의 정치는 실용적인 것을 중시하는 훈구파 공훈세력이 주도하였다. 공신 세력은 점차적으로 특권 세력화 되었고, 성종은 이들을 견제하고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건립하고자 사림 세력을 등용하였다. 사림은 향촌의 중소 지주라는 경제적 기반과 상대적으로 우월한 도덕성을 기반으로 훈구파를 비롯한 기존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갈등으로 인하여 사화라는 사건이 표출되었다.
16세기의 사림이 여러 차례 사화를 당하면서도 선조 초기에 중앙 정계에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향촌사회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대 재생산하는 서원과 농장 등 인적, 물적 자원의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훈구세력과 맞설 때에는 하나로 뭉쳐서 입장을 같이 했지만,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사림은 의견에 맞는 사람들끼리 계파가 갈리기 시작했다. 첫 내부의 갈등은 척신 전치의 잔재를 청산하는 문제로 불거졌다. 이를 둘러싸고 기성 사림과 신진사림이 대립하였는데, 기성 사림은 왕실 외척의 정치 개입에는 반대하였지만 외척중에서 사림을 보호했던 사람을 옹호하려 했다. 반면에 신진 사림은 외척의 정치참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의견을 토로했다.
두 세력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왕실의 외척이자 기성 사림의 신망을 받던 심의겸과 신진 사림의 대표자인 김효원이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대립하였다. 이조 전랑자리는 하급 관리의 인사권을 고나할하는 자리였는데 이를 두고 동서분당(東西分黨)이 발생하였다.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서인,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을 동인이라 불렀다. 이는 그들의 집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두고 부르던 별칭이었다. 동인은 이황과 조식, 그리고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신진세력이 참여하여 붕당의 형세를 이루었다.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들이 가담하면서 붕당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붕당은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경향에 따라 결집되어 정치적 파벌의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붕당은 본디 성리학의 원론적인 원리에서는 금기시 되었으나 성리학이 구양수의 붕당론을 수용해 군자들의 붕당형성을 긍정하면서 성리학을 기반으로하던 조선사회에서 인정될 수 있었다.
16세기 후반 정국을 주도하던 동인은 정여립 모반사건을 잔혹하게 처리했던 정철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북인과 남인으로 다시 나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 남인이 임진왜란 발발로 인한 책임으로 실각하자, 임진왜란 중 항전을 주도했던 대북파가 광해군과 함께 실권을 장악하였다. 광해군은 전후 복구 사업과 중립외교를 통해 황폐해진 조선을 복구하고 안정시키고자 했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 무너지고 서인이 주도하는 정국이 펼쳐졌다.
인조 반정 이후 숙종 초기의 붕당 정치는 나름대로 원칙이 지켜졌으며 상호 비판적 공존체제를 지켜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붕당 정치의 건전성은 17세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붕당정치는 점차 건전한 정책적 비교보다는 국왕의 정통성과 왕위 계승문제를 두고 권력투쟁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붕당 정치는 상대 붕당을 인정하지 않는 일당 전제정치로 변질 되었다. 붕당 정치로 소외된 사림들은 자신의 세력 기반인 향촌으로 내려가 서원을 건립하고 지방민을 상대로 교육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 상황으로 말미암아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영남지역에서 서원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