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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고려의 여진정벌과 금나라

에이구몬 2022. 1. 1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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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고려의 여진정벌과 금나라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이후 북방의 침입에 대비해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장성은 흥화진 압록강에서 시작해서 동해한 함주(함흥) 까지 연결되었다. 천리장성으로 불린 장성은 덕종 2년인 1033년 부터 건설을 시작해 정종 10년인 1044년에 완성하였다. 천리장성 동북 방면에는 여진족이 세력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생여진 계통의 종족이었다. 여진족은 함경도는 물론이고, 두만강 유역과 흑룡강, 송화강 유역에 흩어져 반농, 반목 형태의 경제를 유지했다. 대다수의 여진족은 유목생활에 더 집중했는데, 이들은 주로 두만강 유역에 거주했고, 통일된 정치세력을 형성하지 않고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존재했다. 

그러던 중 여진족의 완안부가 강성해지면서 마천령 이남과 정평 이북의 여진을 모두 흡수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곳의 여진들은 모두 고려에 복속된 촌락들이었는데, 완안부는 이들을 점령하고 고려와의 국경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고려는 임간을 보내 여진을 치게 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의 군세에 밀려 패배하였다. 이에 고려정부는 윤관을 장수로 하여 출진시켰으나 윤관 또한 이들에게 패배하고 겨우 화약만 맺는 수준이었다. 임간과 윤관은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천리장성 밖의 여진은 모두 완안부에 복속되게 되었다.

금나라 기병

임간과 윤관은 여진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고려군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들은 숙종에게 건의하여 별무반을 편성하여 대 여진 전략을 세우고 준비한다. 별무반은 여진의 기병에 대응하기 위해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여진 정벌의 기반을 닦았다. 고려는 예종 2년인 1107년에 여진정벌을 일으켰다. 윤관을 대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하는 17만 대군을 일으켜 동여진 정벌군을 편성했다. 고려군은 여진의 135개 촌락을 점령하고 5,000여명을 포로로 잡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또한 고려는 점령한 지역에 함주를 비롯해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 통태진, 숭녕진, 진양진 등 9개 성을 쌓고 남방의 6만 9천여호를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9성의 위치는 여러 학설이 있다.

고려가 여진으로부터 개척한 9성은 아쉽게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농경지를 뺏긴 여진은 악착같이 고려의 9성을 공격하였고, 외교적으로도 계속해서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 고려 역시도 방비에 막대한 물자가 소모되는 9성의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1년여 만에 주둔했던 군사와 주민들을 다시 천리장성 이남으로 복귀시켰다. 이후 완안부는 걸출한 수장인 아골타가 이끌면서 만주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고는 1115년에 금이라는 국호를 내세우며 황제를 칭했다. 이들은 세력이 강성해지자 고려에 형제의 맹약을 맺고자 했고, 거란을 멸망시키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위시하게 되자 군신의 관계를 맺고자 했다. 고려는 격렬한 논쟁 끝에 무력 저항을 하지 않고 사대의 예를 취해 금나라와 화친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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