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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거란의 침입과 고려의 극복 (여요전쟁)

에이구몬 2022. 1. 17.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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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거란의 침입과 고려의 극복

고려는 국호에서 부터 나타냈듯 건국 초부터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표방하면서 북진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따라 지금의 평양인 서경을 중시하고 청천강 이북으로 영토를 확대하려하였다. 그러한 정책은 만주 일대에서 세력을 영유하던 거란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거란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있었는데, 당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야율아보기라는 걸출한 리더가 나와 부족을 통일하며 거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거란은 중원진출을 위해 우선 후방에 위치한 발해를 공격하여 먼저 멸망시켰다. 그 후 고려 태조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중국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 북진정책을 추진하면서 거란에 강경하게 대응하려 하였다.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거란과 대치하자 광종은 송과 제휴하여 거란을 견제하는 정책을 폈다. 이때 압록강 유역에서 발해의 유민들이 세운 정안국이 송과의 연계를 통해 거란과 싸우자, 거란은 정안국을 멸망시킨 뒤 고려로 침략해 왔다. 거란은 송과의 전쟁에 앞서서 성종 12년에 소손녕이 이끄는 수십만 대군을 보내어 고려를 침입했다. 그러나 송과의 대립으로 거란은 온전히 고려에 신경을 쓸 수 없었고, 이점을 이용하여 고려는 서희를 보내어 외교적 해결에 나섰다. 서희는 고려는 송과 단교하고 요와 통교할 것을 약속하면서, 강동 6주를 확보하였다. 이 강동 6주에 있는 여진으로 인해 요와 원활히 통교 할 수 없는 것을 요에 이야기 한 후 강동 6주의 지배권을 약속 받았다. 담판 이후 고려는 다음해 강동 6주를 공격하여 고려의 영토화를 진행했다.

거란군

그러나 고려는 요와 화친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송과 비밀리에 접촉을 했고, 이러한 고려의 태도에 불만을 가진 요는 강동 6주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강동 6주를 돌려받기 위해서라도 고려에서에 일어난 강조의 정변을 빌미로 침략해 왔다. 거란 성종은 고려의 현종 원년인 1010년에 보병과 기병 40만명을 이끌고 고려로 처들어 왔다. 거란군이 도읍인 개경을 점령하자, 현종은 멀리 나주로 피난하였다. 거란은 점령은 했으나 왕이 없는 빈 도읍을 차지함은 의미 없음을 깨닫고 다시 철군하기 시작한다. 서둘러 철군하지 않으면 고려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퇴각하던 거란군은 고려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개경 또한 거란의 점령에 의해 많은 전각이 불타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귀주대첩 기록화

이후 거란(요)는 고려에 국왕의 친조를 요구했지만, 고려는 거부했고 다시 거란 성종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며 쳐들어왔다. 이번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소규모로 공격하다가 1018년 소배압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침입하였다. 이들은 개경 근처 신은현까지 진격하였으나 더 이상의 진격은 피해가 막심해질 것을 예상하고, 철군을 결정했다. 고려군은 철군하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공격하여 10만명 중 살아남은 자 중 2700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승리로 거란은 고려를 다시 침략할 수 없게 되었고, 고려의 배후에 송나라가 있는 한 송으로 공격도 할 수 없게 되어, 동아시아는 고려, 송, 요 3국 세력의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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