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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背囊)으로 본 역사 앞에서]

에이구몬 2020. 10. 27.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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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背囊)으로 본 역사 앞에서

 

  1. 머리말

  2. 김성칠이 서술한 배낭

  3. 1950년의 배낭과 피난

  4. 결론



  1. 머리말
    사학자이자 광복 직후에서부터 한국전쟁 중인 1951년까지의 일기로 유명한 김성칠은 자신의 일기에 해방 직후 대한민국의 다양한 모습과 한국전쟁 시기 다양한 사건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당시의 생활사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겨 후대의 연구자들에게 훌륭한 사료(史料)가 되어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김성칠이 저술한 다양한 방면의 생활사적 기록들 중 배낭(背囊)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김성칠은 일기에서 자신이 만나게 되는 인물들의 행색(行色)에 대해 서술하곤 하는데, 이때 그 인물이 무엇인가를 나르기 위하여 보따리나 배낭등을 메고 있다면 상세한 기록은 물론 자신의 심정이나 평가까지 기술해 놓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김성칠이 기록해 놓은 사항들 중 보따리를 비롯한 배낭종류에 대한 기록을 따라가 이들을 분석해 보고 나아가 왜 이러한 운반수단에 대한 서술이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2. 김성칠이 서술한 배낭
     『역사 앞에서』에 기록된 배낭(背囊)에 대한 기록들을 상세하게 살펴보자. 김성칠은 보따리, 봇짐, 여러 종류의 배낭들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일기 속 기록들을 따라가 보고 당시의 상황에서 배낭이 가지는 이야기와 의미를 살펴본다.

    1. 보자기(보따리)에 대한 서술
      보자기는 본디 물건을 싸는 작은 천을 뜻하는 말이었다. 보(褓)는 물건을 싸거나 덮어 씌우기 위한 네모난 천이었다. 그중에서도 작은 천을 보자기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혼례에도 쓰일

정도로 익숙하고 널리 쓰이는 물건이었다. 보자기는 평소에는 자리를 적게 차지하면서 필요할 때에는 옷가지나 이불 등 커다란 짐들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큰 용구로 사용이 가능했다. 따라서 주거공간이 협소하고 배낭등에 사용할 자원이 충분하지 못한 서민계층에게 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시대 이후에도 이어져서 김성칠이 일기를 쓰던 1950년대까지도 천이나 가죽으로 만든 공장제 가방보다는 주로 보자기를 활용한 보따리가 주요 운반수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국군과 UN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서울을 공격할때 인민군정 아래 서울에서 활동하던 많은 사람들이 북으로 떠나면서 김성칠과 접촉하는 장면들이 일기에 서술되어 있는데 이때 보따리가 등장한다. 

 

“다 저녁때에 김춘득군이 크낙한 보따리를 짊어지고 찾아왔다. … 그리하여 그는 이제 북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것 같다. 이 몇해 동안 폐를 앓고 지금은 나았다고 하나 아직도 허약해 보이는 그가 저 큰 보따리를 지고 밤길을 톺아서 몇백리 길을 어찌  가내랴 싶다.”
- 1950년 9월 26일 일기 중에서 -

 

이 글을 통해 당시 보따리는 ‘피난’을 하며 부피가 큰 이불이나 살림살이들을 싸서 이동하는데 요긴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춘득군 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 짐을 싸게되는 홍씨부인이나 이석씨의 부인들 역시 기록상 ‘짐’으로 표현되나 모두 보따리로 짐을 쌌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가장 보편적인 운반수단인 보자기가 아니라면 김성칠이 분명 특기하였을 것인데, 간단하게 짐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들도 역시 보따리를 운반수단으로 이용하였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1. 괴나리봇짐에 대한 서술
      괴나리봇짐은 보따리에서 변형된 형태의 운송수단이다. 보따리의 경우 손을 사용해 잡아야만 하기 때문에 양손의 사용이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괴나리봇짐은 어깨에 메는 끈이 달려있어 지금의 가방과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를 등뒤로 메고 사용하면 양손이 자유로워진다. 

 보자기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도 사용되었고 주로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나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는 과거 응시자들이 이용하였다. 괴나리봇짐은 원시적 형태의 배낭으로 이 안에 물건을 수납하기 위해서는 천으로 물건을 싸야 하는데 천이 품을 만한 작은 물건만 수용이 가능해 여기에는 주로 여행을 위한 노자나 옷, 문방구등을 넣어 다녔다. 물건을 천 안에 넣고 둘둘 말아 원통 형태로 만들어 끈을 이용해 어깨에 멘다. 끈은 물건을 수용하는 천 자체에 끈이 박음질 되어 있거나 아니면 따로 묶어 사용하기도 했는데 천이 아닌 새끼줄로 그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김성칠은 기록에서 괴나리봇짐을 쓰는 것에 대해 상당히 낮은 평가를 주고 있다. 김성칠의 집에서 몇일간 묵은 인민군이 쓰는 봇짐을 보며 군대가 조악한 봇짐을 쓰는 것에 낮은 평가를 하는 서술을 보인다. 


“ ... 그들에게는 배낭이라고 이름지을 만한 것이 없다. 가죽은 없더라도 베로라더 지어 썼으면 좋으련만 괴나리봇짐 그대로의 행색이다.”
- 1950년 9월 20일 -

 

이 서술에서 인민군조차 괴나리 봇짐을 쓰는 것에 낮은 평가 외에 별다른 서술은 나타나지 않지만 그래도 군대인 인민군조차 가죽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베로 된 배낭하나 없다는 것에서 당시까지 쌓여있던 인민군에 대한 실망감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인민군이 처음 서울에 들어왔을 때에는 적개심이 나지 않는다거나 대체로 규율이 엄격하고 훈련이 철저한 것 같이 보여 첫인상이  우 좋았다라고 한 것과는 상반된다. 이는 2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가까이에서 인민공화국과 인민군을 지켜본 결과 결국 대한민국의 대포소리에 마음이 설레게 되었다는 맥락과 일치한다. 인민공화국과 인민군의 행태에 지친 나머지 7월에는 보이지도 않던 괴나리봇짐을 보고도 9월의 김성칠은 실망을 하게 된다. 

 

    1. 가죽가방에 대한 서술
      인민군이 집에 머무를 때 김성칠은 인민군 소대장이 지니고 있던 가죽가방에 대한 서술을 남겼다. 1950년 당시 사무용 가죽가방은 흔치는 않은 물건이었던 듯 김성칠은 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소대장 동무만은 훌륭한 사무용 가죽가방을 지니었는데 이는 분명히 노획품인듯, 신사복에나 어울릴 것이지 이를 들고 한만히 전장에 나다닐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그도 이것만은 짐작이 가는 듯 차마 들고 가지는 아니하고 괴나리 봇짐에 싸서 연락병 등에 지웠다.”
- 1950년 9월 20일 - 

 

 김성칠의 기록에 따르면 전장에 맞지 않는 사무용 가죽가방을 인민군 소대장이 지니고 있자 이를 두고 노획품이라고 확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마 이러한 확신을 보인것으로 미루어볼 때 김성칠은 어느정도 사무용 가죽가방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성칠은 경북고등학교를 나오고 일본 유학과 경성제대를 거친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계층이다. 특히 금융조합(농협 전신)에 근무한 이력이 있으므로 사무용 가죽가방과 매우 연관이 깊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대학교수가 되면서 더욱이 가죽가방을 보게되었으므로 당시 가방을 잘 보지도 못하던 다른 이들에 비해서는 조예가 깊다고 추측 할 수 있다.
이 가죽가방을 보면서 김성칠은 어울리지 않는 장소(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가방)이 있는 상황에 소대장이 그 가방을 들지 않고 연락병의 짐에 넣는다고 기술했다. 이 부분은 김성칠이 소대장의 심리를 추측한 내용으로 이 사무용 가죽가방을 보며 이 가방을 들고 출근해야하는 이는 김성칠 자신인데, 그러한 가죽가방은 군인의 손에 들려있고 자신은 집에서 하릴없이 숨어사는 처지임을 은연중에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1. 란도셀에 대한 서술
      란도셀은 일본 소학교 학생들이 메는 대표적인 가방으로 어원은 뒤로 메는 배낭을 뜻하는 네덜란드어 'ransel'에서 비롯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전파된 가방은 막부 말기 서양식 군사제도를 차용하면서 일본으로 도입되었다. 원래는 군용 배낭이었으나 용도가 극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학습원 초등과가 생겼을때의 일이다. 학습원에는 당시 세자이던 다이쇼천왕이 다닐 예정이었는데 천왕의 스승이던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의 제자에게 군용 란도셀을 헌상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란도셀은 통가죽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 가격이 매우 높은 가방이었다.
      김성칠의 일기에서 란도셀은 인민군이 집에 머물때 등장하는데 그 상황이 자못 흥미롭다.

 

“ ... 연락병을 시켜서 대청 벽에 걸린 란도셀을 줄 수 없느냐는 것이다. 아내가 봉아를 붙들고 나중에 더 좋은 것을 사줄 테니 네 란도셀을 인민군 아저씨에게 주자고 타일러서 승낙을 얻었다. 소대장동무 … 매우 기분이 좋으시다.”

  • 1950년 9월 20일 -

 기록에 따르면 김성칠의 집 대청마루에는 란도셀이 걸리어 있고 이를 본 소대장이 가방을 탐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 가방은 김성칠의 2남 봉아(1945년생: 당시 6세)의 허락을 받고 소대장에게 주는 것을 보면 봉아가 학교에 가면 주려고 대청에 걸어둔 것이라 추측 할 수 있다. 

 란도셀은 당시에 매우 비싼 물건으로 50~60년대까지도 남한사회에서 보자기에 책을 넣고 책보라고 부르며 가지고 다녔던 것으로 미루어볼때 김성칠은 계속 자신이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중류층 이상의 생활 수준을 영위하고 있었다고 추측 할 수 있다.

  1. 1950년의 배낭과 피난

    1. 1950년대의 배낭
      왜 김성칠은 이러한 배낭종류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남겼을까? 1950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반수단으로 보따리를 사용했다. 물론 보따리는 보관할때 부피가 작아 절대적으로 거주공간이 부족한 서민들에게 널리 이용되었고 또한 가격이 비싸지 않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전후 사회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이 아닌 타 계층에서 가방에 대한 수요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가방이 고가의 물품이기 때문이다. 가방은 주로 캔버스나 가죽을 이용해서 만들어지는데 이는 모두 고가의 물품이었다. 게다가 가죽은 전략물자이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 사이에서 이른바 사치품에 가까운 ‘책이나 서류’를 넣는 가방은 보는 것 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김성칠은 보따리가 아닌 배낭을 볼 때마다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상세한 기록이 남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물건임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김성칠의 배낭 서술에서 우리는 1950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인식해야한다. 당시 배낭을 준비한다는 것은 떠날 것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전쟁과 배낭을 꾸려 떠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속에서 김성칠은 자신이 만나는 사람의 배낭을 서술하므로서 그가 곧 떠남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1. 배낭의 의미와 피난
      김성칠이 배낭에 대한 서술과 함께 기록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어떠한 인물의 이동이다. 지금도 어디론가 떠나려면 “가방을 싼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김성칠의 일기에서 인물들은 배낭을 통해 현재의 위치에서 떠나곤 한다. 그러한 이동의 형태 중 대표적인 것은 ‘피난’이다.
      전쟁으로 인한 급박한 이동은 정말 필요한 물건 일부와 귀중품만 챙겨서 이동하는 행동으로 이어졌고 김성칠은 그러한 보따리를 들고 이동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별과 어지러운 시대를 생각했다.
      수 많은 피난민들은 고향과 집을 둔채로 길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자신들의 세간을 배낭에 싼 채 길에서 생활하는 것은 고역중에 고역이었으며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오게되면 이들의 삶은 더욱 처참하게 변하게 되었다.

  1. 결론
    김성칠은 자신에 일기에 보따리를 포함한 다양한 배낭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었다. 이러한 기록이 남은데에는 당시 배낭같은 물건이 귀했기에 서술하기도 했고 또한 상황이 인상깊어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있던 어떤 인물이 주변을 떠나갈때 그들에 대해 묘사하면서 보따리를 통해 그들과의 이별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아가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으로 갈리어져서 끝없이 피난하지 않고서는, 끝없이 짐을 싸지 않고서는 버티어 살아갈 수 없는 당시 사람들의 현실을 생각하게 하였다. 수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이 시기를 김성칠은 관찰자이자 기록자로서 담담히 묘사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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