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사] - 흉노와 한의 관계변화
흉노와 한의 관계변화
기원전 60년 허려권거 선우가 사망하면서 흉노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휘말렸고 곧 내전으로 격화되었다. 곧 내전은 수습되고 우현왕이던 악연구제가 선우를 계승하면서 자신의 즉위에 반대한 흉노 귀족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탄압을 받던 귀족들은 호한야라는 인물을 선우로 옹립하여 악연구제에게 대항하였다. 초원에는 2명의 선우가 있었고 곧 내전으로 다시 격화되었다. 이에 호한야의 세력이 승리하는듯 하였으나 호한야의 형인 질지가 그를 축출하면서 상황은 다시 급변한다. 호한야는 몽골초원에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여 기원전 52년 추종자들을 이끌고 고비사막을 건너 한의 황제에게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흉노 군주의 친조에 당황한 한나라는 전례없는 일을 슬기롭게 잘 처리하였다. 황제보다는 아래에 그러나 제후왕들 보다는 위에 흉노의 군주를 놓고 황제에 버금가는 대접을 해주었다.
호한야는 입조는 물론이고 스스로 신하라 칭하고 질자를 들이고 공물을 헌납하였다. 이로써 황제와 군신관계를 맺게되었는데 한과 흉노의 관계도 화친이 아닌 조공관계가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한나라는 중화사상에 입각한 조공체제의 완성과 흉노의 정치적 복속을 모두 얻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였으나 부작용도 있었다. 호반야에게 들어가는 경제적인 하사품이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입조를 하여 공물을 바치게 되면 얻는 하사품이 상당하다는것을 깨달은 호반야는 기원전 51년에 입조하여 선제를 배알하였다. 당시 하사품은 황금 약 5킬로그램과 현금 20만전, 비단 8천필 등이 있었다. 조공이 곧 경제적 보상을 약속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호반야는 기원전 50년, 1년뒤인 기원전 49년에 계속해서 조공을 해왔다. 호반야는 이러한 물질적 지원에 힘입어 기원전 43년에는 고비사막 건너 북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호반야의 형 질지는 호반야를 피해 서쪽으로 이주하였으나 기원전 36년 한의 서역도호 감연수에게 공격당해서 죽었다. 경쟁자가 사라진 초원에 유일한 선우인 호반야는 흉노를 이끌게 되었다.
흉노의 유일한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호반야는 계속해서 한에 입조하였다. 기원전 33년 다시 입조했고 이번에는 지난번의 두배의 하사품을 받아갔다. 기원전 3년에는 호반야의 아들 오주류약제가 다시 입조를 청했으나 한의 거부로 돌아갔다.
한의 물질적인 지원을 대가로 평화를 사는 대응은 종래에 흉노가 행해오던 약탈경제 보다는 한에게 훨씬 더 이득이었다 . 더욱이 중화질서 표방과 흉노와의 군신관계 성립은 여러모로 한에게 이득이었다. 그러나 하사품이 가져다 주는 경제적 부담이 적은것만은 아니여서 호반야의 아들이 입조하는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왕망이 제위를 찬탈하고 전한을 멸망시키므로서 흉노와 관계는 파탄을 맞게되었다. 왕망은 신을 건국하면서 흉노를 격하하고 멸시하면서 종래의 약탈과 침입이 계속되는 관계로 한과 흉노는 회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