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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 러일전쟁과 일본 제국주의의 완성

에이구몬 2018. 11. 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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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과 일본 제국주의의 완성


청일전쟁이 일본의 압도적 우위로 끝난 이후 일본은 다시 러시아와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인해 일본은 더 이상 조선에 내정간섭을 할 수 없었고 친러 정권이 세워져 일본에 불리한 형국이 되었다. 또한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이 할양 받지 못했던 요동반도의 여순과 대련을 조차 하였다.


일본이 눈독들였던 요동반도와 한반도의 이권들을 러시아가 가져가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1900년 러시아군의 만주 진군에 의해 결정적으로 갈등이 터져나오게 되었다.

중국의 반외세운동인 의화단 사건이 청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서양 열강들은 8개국 연합군을 중국 영토 내부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일환으로 러시아도 군대를 만주로 진군시켰다.

하지만 미처 군사작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의화단 사건이 진압되고 8개국 연합군은 청 영토 내로의 진군에 대한 명분이 사라진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만주에 군대를 계속해서 주둔시키면서 이 지역에 대해서 세력 확장을 꾀했다.


러시아군의 만주 주둔은 다른 열강들의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나 영국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영국과 1902년 런던에서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영일동맹은 유사시 군사개입을 명문화 했으며 일본이 조선에 대해 식민지화를 하는것을 사실상 승인하였다. 영일동맹의 압력으로 러시아는 1902년 단계적 만주 철군을 약속했지만 일부만 철수 하는데 그쳤다. 1903년에 러시아와 일본은 러일협상을 진행하여 만주와 조선에 대한 권일을 조정하고자 하였으나 결렬되었다.

러일 협상의 결렬은 일본 국내에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강경론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청일전쟁의 승리로 인하여 일본 내부에는 군사적 자신감이 과도하게 들어가 있었고 전쟁배상금을 국내에 재투자하므로서 경제 활성화를 꾀했던 과거가 있기에 이러한 강경론은 큰 지지를 받았다. 러일 협상이 1903년 말 결렬되면서 양국의 갈등은 전쟁으로 불거지게 되었다.

▲려순구격전지도


1904년 2월 4일 일본은 러시아와 단교할것을 선언하고 8일 여순을 공격하여 전쟁을 시작하였다.

여순을 봉쇄하여 두고 5월이 지나자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육군을 진격시켰다.

이듬해 1월 여순항이 함락되고 육군이 만주의 중심도시인 봉천을 공격하여 3월 10일에 장악하였다.

5월 27일에는 극동으로 급파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동해에서 전멸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전세계적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의 견제를 받으며 수에즈 운하도 이용하지 못핸 채 지구를 반바퀴 돌아 동해에 도착했지만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한채 일본 해군과 싸워야 했다. 전투력 저하는 곧 패배로 이어졌다.

일본군 또한 피해가 적은것은 아니었다. 봉천 전투에서 일본군은 극심한 물적 인적 손해를 겪으면서 한계에 봉착했다. 러시아는 패배의 혼란과 함께 1905년 1월 혁명으로 정치적 혼란까지 가중되었다.

두 국가 모두 그로기 상태에 빠지자 양국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를 받아들여 8월 미국 포츠머스 에서 강화회담을 시작했다. 곧이어 9월 5일에 강화조약에 조인했다. 조약의 주요내용은 일본이 조선에 대해서 우월한 지위를 가진다는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러일전쟁을 일본이 승리하면서 한반도는 더 이상 일본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졌고 일제는 식민지 건설에 돌입했다. 조선을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의해 보호국화 하였고 1910년에는 완전히 식민지로 편입 하였다. 일본은 청과 러시아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힘든 싸움을 해냈고 조선이라는 식민지까지 편입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으로서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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