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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 오다 노부나가 정권과 혼노지의 변

에이구몬 2018. 10. 2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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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정권과 혼노지의 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34년 6월 23일 ~ 1582년 6월 21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34년 6월 23일 ~ 1582년 6월 21일)는 센고쿠 시대를 평정한 인물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연 다이묘이다. 오와리국의 센고쿠 다이묘 오다 노부히데의 장남으로, 아버지 대부터의 숙적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격파하고 정이대장군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해 교토를 수중에 넣고, 그마저 추방해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키면서 중부 일본 일대를 기반으로 중세 일본 봉건제의 정점에 섰다.


일본 각지역의 패자들을 차례차례 굴복시키면서 센고쿠 시대의 일본을 평정해 나갔다.


그러나 1582년(덴쇼 10년) 음력 6월 2일,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중신(重臣)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을 막지못해 혼노지에서 자살했다. 이미 형식상으로나마 가권은 장남 오다 노부타다에게 넘긴 상태였으나 장남마저 교토의 니조 성에서 살해돼 후계자리가 또다른 중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넘어갔고, 이런 일본 통일의 기반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를 여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생애 내내 당시의 기득권을 부정하고 처음부터 무력으로 무너뜨렸고,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했으며 정책적으로도 낙시락좌(楽市楽座: 자유무역정책), 검지(検地: 토지조사), 서양에의 문호 개방 등 봉건적 일본에서 누구도 시행하지 않았던 정책결단으로 문화 경제적 발전을 이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열었다. 종교 정책에 있어서도 기존 불교신토 세력의 권위를 부정했고, 포르투갈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천주교 포교를 허용하고 자신도 잠시 관심을 가졌으나 결국 자신을 신격화 하는 데로 나아갔다.


▲ 오다 가문의 문장. 상징에는 모과꽃이 쓰였다.


노부나가는 자기의 뿌리를 헤이시(平氏)라 자처했으나 그의 혈통 서열은 오와리 집정관이었던 시바 가문의 밑의 밑이었다. 무로마치 막부가 파견한 지방관을 슈고 다이묘라 했는데, 원래 막부가 임명한 오와리 다이묘는 시바 씨였으나 동쪽 이웃 세력인 이마가와 씨의 거듭된 침공으로 힘을 잃고 시바 씨의 신하이자 슈고 대리였던 오다씨들이 실권을 잡은 상태였다. 이들이 본가인 오다 야마토노카미 집안이다.


1559년(에이로쿠 2년) 오와리 국의 지배권을 확립한 노부나가는 오와리의 진정한 지배자가 됐다. 노부나가는 100명의 군세를 끌고 교토로 상경해 무로마치 막부 1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배알했다. 그는 교토에 있던 옛 시바 집안의 저택을 개수해 오다 집안의 교토 거처로 삼았다. 오다 노부나가는 그곳에서 귀족들을 만나고 일황을 배알하는 등 교토 조정 업무를 봤다.


1560년(에이로쿠 3년) 음력 5월 숙적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직접 오와리 국으로 침공해 온다. 스루가 국, 도토미 국, 미카와 국 등 3개 쿠니, 즉 현재 일본의 아이치현시즈오카현의 거의 전부를 아우르는 이마가와 집안의 군세는 2만에서 4만에 이를 정도의 대군이었다. 5년 전 타계한 이마가와 집안의 집정 다이겐 셋사이의 기획 아래, 사가미 국의 호조, 가이 국의 다케다 집안과 삼국 동맹을 맺어 수 년간 역량을 비축해뒀던 이마가와 집안은, 아예 무로마치 막부 자체를 무너뜨리고 새로 막부를 차릴 기세로 서쪽의 교토를 향해 총공세를 폈다. 교토로 가는 길목인 오와리 국의 오다 군은 북쪽 미노에 대한 대비 역시 해야 했으므로, 이마가와에 대해 동원가능한 총병력이 총 3천에서 5천 정도에 불과했다. 이마가와 군은 미카와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미카와 군을 선봉으로 해 오와리 변경의 성채를 차례차례 점령해 들어갔다.


▲오케하자마 전투를 그린 우키요에



오다 집안 내부에서도 이마가와 집안에 항복하고 그 밑에 서야 한다는 의견과 다같이 죽더라도 옥쇄를 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뉘어 중신끼리 싸움을 벌이는 등 주전론과 주화론이 팽팽히 맞섰지만, 어느 누구도 오다 집안이 이마가와 군을 이긴다는 의견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젊은 신진들만이 이 곳 저 곳에 첩자를 보내 이마가와 군에 이길 방책을 모색할 뿐이었다. 이길 방책은 선제 기습 뿐이었고 적당한 시기와 장소를 물색하고 기다리던 중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본대가 적당한 장소에 들어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노부나가는 평소 좋아하던 《아쓰모리》를 추고 갑옷을 입고 달려나가 아쓰다 신궁(熱田神宮)에 참배했다. 참배하면서 뒷따르는 군사들을 기다리던 그는 젠쇼지 성채에서 약 4천의 군을 정비한 후, 악천후 속에 야전 휴식중이던 적의 본진을 기습해 적장 요시모토의 목을 베었다. 이를 [오케하자마 전투]라고 한다. 급격히 보조가 무너진 이마가와 군은 대장과 핵심 가신들을 모두 잃는 괴멸적 데미지를 입고 동쪽으로 급히 퇴각했다.


노부나가는 미노 국 공략을 위해 도쿠가와와 동맹할 필요가 있었고, 어린 시절의 인연을 활용해 1562년 양자가 기요스 성에서 만나 동맹을 맺었다. 이를 기요스 동맹이라고 하며, 노부나가의 사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때까지 두 집안의 결속은 유지된다. 노부나가는 이듬해인 1563년 기요스 성을 나와 거처를 미노 국경 근처인 고마키 산성으로 옮기고, 교토 및 오미 국과 당시 일본의 국제항 사카이 항구 등에 인맥을 넓혀 대량의 조총과 물자를 새로 들여오는 등, 미노 공략을 너머 중부 일본 장악을 목표로 역량을 집중해 나갔다.


노부나가와 미노의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오케하자마 전투를 전후해 양자는 몇 번 공방전을 거듭했으나 결판은 나지 못했다. 그러나 1561년(에이로쿠 4년)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 사이토 요시타쓰가 급사하고, 그의 적장자인 다쓰오키가 미노 국 다이묘에 올랐다. 노부나가는 곧바로 미노로 출병해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모리베 전투) 노부나가의 오다 씨는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었음에도 당시 일본 최고의 군사라 명성이 자자했던 다케나카 한베에 등과 사이토 씨 내부 결속에 의해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노부나가는 이에 사이토 씨 세력 내부에 분열 공작까지 들어가야 했다.

1564년(에이로쿠 7년)에는 오미 국의 아자이 나가마사와 동맹을 맺고 미노에 대한 견제를 강화한다. 노부나가는 아자이 씨와의 동맹을 굳히기 위해 친동생인 오이치 공주를 아자이 나가마사와 결혼시킨다. 말그대로 정략 결혼이었다. 이듬해인 1565년엔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원군 요청을 핑계로 이세 국으로 진출해 간베 토모모리 등 이세 국의 토호세력들과 전투를 벌인다. (북이세 십팔가 공략)


1567년(에이로쿠 10년) 요시오키의 잇단 실정에 실망한 다케나카 한베에와 안도 모리나리 등이 사이토 씨의 본성인 이나바 산성을 점거 후, 가지다(加治田) 성주 사토 타다요시 등과 합세해 미노 중부의 대부분을 손에 넣는 사태가 벌어진다. 반란군이었던 사이토 씨의 중진 삼인방들(이나바 요시미치,우지이에 나오모토, 안도 모리나리)을 회유하는 데 성공한 노부나가는 드디어 미노를 손에 넣었다. 이윽고 이세·나가지마 지방까지 공략에 성공한 노부나가는 미노 국과 오와리 국 2개 쿠니의 통합 다이묘가 됐다.(이나바 산성 전투)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3세였다.


미노 공략에 성공한 노부나가는 거처를 이노구치 성으로 옮기고 유명한 고승인 타쿠겐 소온의 조언을 받아들여 성의 이름을 기후로 개칭했다. 그리고 그에게서 천하포무(天下布武) 네글자가 새겨진 인장을 받아 공식 문서에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자신이 일본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공식화한 것이다.


1568년 음력 9월 노부나가는 적통 쇼군을 옹립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상경전을 개시했다. 남 오미의 롯카쿠 요시카타, 요시하루 부자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간논지 성이 함락되자 이가로 도주했다(간논지 성 전투). 이후 요시카타, 요시하루 부자의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으나 노부나가는 이미 롯카쿠 가문의 종가 롯카쿠 요시히데, 요시사토를 앞세워 남오미를 평정했다. 오미와 이세까지 평정한 노부나가가 상경에 성공하자 미요시 요시쓰구와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노부나가에게 항복했고 미요시 3인방은 미요시 씨의 시코쿠 영지인 아와 국으로 도주했다.

이케다 가쓰마사의 항복을 마지막으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제 15대 쇼군으로 옹립한 노부나가는 교토에 입성했다.  요시아키가 부쇼군의 지위를 내리자 사양하는 대신 사카이 항구의 독점권을 약속받았다.

이세 전체를 장악한 노부나가는 기나이(일본 중부)의 패자가 됐다.


이후 노부나가는 피비린내 나는 통일전쟁을 계속 추진해나갔다.


1570년 아자이 나가마사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연합군을 아네가와 전투에서 물리치고

1571년에는 강력한 종교적 권위와 경제력을 자랑하던 중세 종교세력이였던 엔랴쿠지를 붍캐웠다.

한편 쇼군 요시아키는 노부나가 세력에 대항하여 아자이, 아사쿠라, 다케다 가문과의 연합을 꾀하였으나 강력한 반노부나가 세력이었던 다케다 신겐이 1573년에 교토로 향하던 중 급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노부나가는 나가마사와 요키카게를 물리치고 일황이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쿄토에서 추방시키므로서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량의 총포를 이용한 전법으로 당시 최강의 기마군단을 이끌단 다케다 가쓰요리를 물리쳐 전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1576년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아즈치성 건설에 착수하여 3년뒤인 1579년에 완성하였다. 5층 7단의 천수각과 금빛 최상층, 붉은색 난간, 푸른식 기와에서 드러나는 장엄함과 화려함은 노부나가의 권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노부나가는 교토 입성이후 1580년까지 교토를 중심으로 긴키 도카이 에치젠 북쪽지역의 잇코 잇키세력과 대치하였으며 1세기 이상 존속해온 이들 세력을 해체시키므로서 이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이 지역을 평정하면서 노부나가는 전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일본 중부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과정에서 노부나가는 중세의 정치, 사상, 경제, 질서를 완전히 부정하고 새로운 지배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당시 최고 경제도시이자 자치도시인 사카이를 지배하에 넣으면서 기나이의 높은 생산력을 자신의 통제아래 두었다. 또한 교통과 유통을 원할하게 하고자 검문소를 철폐했다.


무사와 상공인의 도시 집주를 추진하여 근세적 도시를 창출하고 영주에게는 토지의 생산량을 신고하게 하여 토지의 지배자, 경작자, 면적과 생산량등을 파악하고자 하여 중세를 부정하고 근세로 나아가는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 혼노지의 변을 그린 우키노에 (메이지 시대, 요사이 노부카즈)


그러나 노부나가는 덴쇼 10년(1582년) 여름, 음력 5월 29일 모리 원정 출정에 대한 준비를 위해 거성인 아즈치를 떠나 교토로 상경하였고, 혼노지에서 숙식하였다. 하지만, 원군으로 보내질 아케치 미쓰히데의 부대는 방향을 바꾸어 돌연 교토로 진입하였고, 음력 6월 2일 혼노지를 급습하였다. 기밀 유지를 위해 혼노지를 급습하기 전까지 목표가 노부나가가 있는 혼노지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고 "교토에서의 열병식에 참가하기 위해서 교토로 간다"라고 말했다 한다. 혼노지를 급습하기 직전에서야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에 대한 쿠데타가 목표인 것을 수하 군사에게 알리는데, 이때 미쓰히데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그 유명한 "적은 혼노지에 있다"이다. 1백 명 정도의 호위군 밖에 없었던 노부나가는 미쓰히데의 반란 소식이 알려지자 "어쩔 방도가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창을 가지고 항전했으나, 압도적 병력차 때문에 수세에 몰렸고 노부나가는 처소로 돌아가 혼노지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자결하였다.

향년 49세의 나이로 전국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자신의 부하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를 [혼노지의 변]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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