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 아스카문화
아스카 시대
飛鳥時代
아스카 시대(일본어: 飛鳥時代 아스카지다이[*])는 고훈 시대의 종말기와 겹치기도 하지만, 6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반에 걸쳐 아스카에 궁전, 도시가 세워진 시대를 가리키는 일본 역사의 시대 구분의 하나이다. 이전엔 고훈 시대와 합쳐서 야마토 시대로 부른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스카 문화(飛鳥文化)와 하쿠호 문화(白鳳文化)가 개화한 시기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아스카 시대의 한자를 그대로 읽어 비조시대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시대에 왜국(倭国)에서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했다고 한다.
6세기 말에는 한반도에서 불교가 전래되어 7세기 전반의 아스카 시대에 일본 최초의 불교 문화가 생겨났다. 7세기에 이르러 도래인 계열 씨족 중 대표적인 씨족이었던 소가 씨(蘇我氏)는 불교를 앞세워, 보수세력으로서 불교에 반감을 가진 모노노베 씨 등의 경쟁 씨족을 제압하고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어 5대에 걸쳐 일본 왕실의 외척이 되어 정치적으로 실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쇼토쿠 태자
천황의 섭정인 쇼토쿠 태자는 불교를 후원하였고 604년에 만든 십칠조헌법에 불교에 관련된 내용도 들어 있다. 이처럼 소가 씨를 비롯한 도래인 씨족이 일본 왕실을 위협하자 나카노오에 황태자는 645년 정변으로 소가 씨를 멸문하였으며, 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니와(難波)로 천도하고 이듬해 다이카 개신에 관한 조칙을 공포하였다. 다이카 개신 이후를 하쿠호 문화로 구별하기도 한다. 이후 임신(壬申)의 난(일본어: 壬申の乱, 672년)을 거쳐, 681년 덴무 천황이 최초로 율령 반포를 준비한 이래 8세기에 접어들어서 당나라의 율령을 기반으로 한 일본식 율령의 본격적인 편찬이 시작되고 701년 (다이호 원년)에 다이호 율령을 반포하여 첫 결실을 거둔다.
호류사
아스카 시대의 불교 예술은 사원에 건축할 때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사원이 아스카사와 나라외곽에 쇼토쿠 태자가 만든 호류사가 있다(호류사는 아스카 시대 후에 만들어졌지만 초기 불교 작품임).
아스카 명칭의 유래
현재의 나라현 다카이치 군 아스카 촌근방에 해당하는 「아스카」에 궁전, 도시가 세워져 있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아스카 시대라고 하는 시대 구분은 원래 미술사와 건축사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말이다. 1900년전후에 미술학자 세키노 다다스와 오카쿠라 덴신에 의해 제안되어, 세키노는 다이카 개신까지를, 오카쿠라는 헤이조쿄 천도까지를 아스카 시대라고 하였다. 일본사에서는 보통 오카쿠라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있으나, 현재에도 미술사나 건축사 같은 분야에서는 세키노의 제안이 사용되어, 다이카 개신 이후를 하쿠호 시대(白鳳時代)라고 구별하기도 한다.
시기별 개요
긴메이 조정 (539년 ~ 571년)
성왕(재위 523 ~ 554년)때,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538년). 이 불교의 전파를 기점으로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구분짓는다. 성왕은 긴메이 천황(재위 539년 ~ 571년)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냈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은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 긴메이 천황과 소가노 마치의 후손이자 호족인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불교를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긴메이 천황은 둘 사이에서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백제는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딸려서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견(552년)하였다. 이 번개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이므로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 이렇게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으며 성왕은 또한 의박사 ·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스이코 조정(593년 ~ 628년)
587년 천황이 불교에 귀의하여 모노노베노 모리야와 소가노 우마코가 대립하게 된다. 후의 쇼토쿠 태자는 소가 씨 편에 서서, 모노노베 씨를 멸망시켰다. 모노노베 씨를 멸망시킨 이후 약 반세기 동안 소가 씨는 대신(大臣)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588년에는 소가노 우마코가 아스카에 호코지(法興寺)를 세우기 시작한다.592년 소가노 우마코는 야마토노아야노 코마에게 스슌 천황을 암살하게 하고, 여제 스이코 천황을 옹립한다. 우마야도 황자(쇼토쿠 태자)는 황태자로 세워지고 섭정이 되었다. 스이코 천황은 소가노 우마코의 협력을 얻어 내외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응해서 국정을 이끌어 갔다. 스이코 천황은 우선 불교에 의한 국내의 통일을 꾀하기 위해 불교흥륭의 조를 공포했다. 그리고, 관위12계를 제정(604년)하여 개인의 재능과 공적에 따라서 유교의 덕목인 덕(德)․인(仁)․예(禮)․의(義)․지(智)를 취하여 이를 대소로 나눠 12계로 하는 지위를 정하고 그 상징으로서 색과 장식에 의해 등급을 표시한 관(冠)을 수여한 것이다. 쇼토쿠 태자가 십칠조헌법을 만들어 불교의 번성에 힘을 쏟는 등, 천황중심의 이상적인 국가체제를 세우는 초석을 쌓았다.
607년, 오노노 이모코가 견수사로서 수를 방문하여, 수의 황제에게 국서를 전달한다. 유학생, 유학승을 수에 유학시켜서 수의 문화를 크게 받아들여, 국가의 정치・문화의 향상에 노력했다. 620년에는, 쇼토쿠 태자가 소가노 우마코와 함께 덴노키, 고쿠키 등을 편찬했다.소가 가문은 소가노 이나메(蘇我 稲目, ? ~570), 우마코(馬子, ? ~626), 에미시(蝦夷, ?~645), 이루카(入鹿, ?~645)의 4대에 걸쳐 번성하여 그 세력이 천황을 능가하게 되었다. 622년에 쇼토쿠 태자, 628년에 스이코 천황이 죽자, 소가노 에미시는 자신이 추대한 조메이 천황(舒明) 덴노(재위 629~641)를 억지로 즉위시킨 후, 병사로 하여금 자신의 저택을 지키게 하고 자기의 묘를 만드는 데 전국의 백성을 사적으로 부리며 그것을 ‘미사사기(陵, 원래 덴노의 묘를 부르는 말)’로 부르게 하는 등 신하로서의 도를 넘는 파행이 눈에 띄었다.
국조제(国造制)가 늦어도 스이코 조정 즈음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국조(国造)란 왕권에 복속한 각지의 유력호족에게 부여한 일종의 호칭으로, 야마토 정권의 지방관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다.
죠메이・고교쿠 조정(~645년)
고교쿠 천황 4년(645년) 음력 6월 12일(양력 7월 10일)에, 나카노오에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와 모의해, 당시의 권신이었던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를 고교쿠 천황이 보는 앞에서 참살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을사의 역) 이루카의 아버지 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는 이루카가 참살당한 다음 날에 자결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고교쿠 천황의 양위에 따라 고교쿠 천황의 동모제(同母弟)를 고토쿠(孝德) 천황(재위 645~654년)으로 옹립하고, 나카노오에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일본 최초로 연호를 다이카(大化)로 정하고 개혁을 실행했다(→다이카 개신). 또한 아리마(有間) 황자와 같은, 자신과 대립한 유력 세력을 여러 가지 수단을 써서 제거해간다.
고토쿠 조정(645년~654년)
사이메이 조정 (655년 ~ 661년)
660년에 백제가 나(羅)·당(唐) 연합군에게 패하여 수도가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하였으며, 왕족과 대신들이 당에 포로로 끌려가는 가운데, 복신(福信)·도침(道琛)을 중심으로 한 백제부흥운동 세력은 당시 왜 조정에 체류하고 있던 옛 백제의 왕자 풍장(豊璋)을 돌려보내줄 것을 요청해 왔다.
텐지 조정(661년~672년)
직접 츠쿠시(筑紫)까지 나아가 백제 부흥군 지원을 위한 원병 파병에 힘쓰던 사이메이(齊明) 천황이 재위 7년만인 661년 음력 7월 24일(양력 8월 24일)에 죽은 뒤 나카노오에는 황태자로서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즉위식을 치르지 않고 오랫동안 칭제(稱制)의 형식으로 국정을 맡아보면서 백제 부흥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백제에 파병한 구원군은 덴지 2년(663년) 음력 7월 20일(양력 8월 28일)에 백강(白江) 어귀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처참하게 궤멸되고(백강구(白江口) 전투) 백제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신라 · 당과의 국교를 재개하기 위해 견신라사, 견당사를 파견하였다.
문화
아스카 문화(飛鳥文化)는 7세기 전반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시기에 아스카(飛鳥) 지역에서 발달한 문화이다. 일본 최초의 불교 문화인데, 백제로부터 불교를 수용한 결과였다. 백제에서 보낸 조사공(造寺工), 불공(佛工), 와공(瓦工), 노반공(露盤工) 및 화공(畵工)의 손에 의해 일본의 사찰들이 창건되었다. 유교와 도교 등 외래 학문과 사상이 다양하게 나타나 국제성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백제 유학자 왕인은 아스카 문화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소가노 우마코의 주도하에, 백제의 승려와 장인들은 사찰, 호코지를 지었다. 고구려의 승려 혜자와 백제의 승려 혜총은 호코지에 살면서 포교하였다. 이들은 본국인 백제와 고구려에서 많은 승려를 불러오는 한편, 많은 도서를 수입하여 일본의 문화 건설에 이바지했다.쇼토쿠 태자에게 《법화경》을 진상하고 강독한 것은 혜자이며, 불상과 불각(佛閣) 등을 만드는 역할을 한 것은 혜총 대사이다. 그리고 호류지의 그 유명한 벽화는 고구려의 담징이 그린 것으로 되어 있다.
관련기사: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8895365
금당벽화
담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금당벽화는 우리나라의 석굴암 중국의 운강석불과 더불어 동양의 3대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금당벽화는 관능적이고 풍요로운 아름다움이 특징인 아잔타 벽화의 기법을 계승하고 있지만 또 다른 아름다움을 풍긴다.
미술
538년의 불교 전래에서부터 중앙집권 정치가 시작되는 645년의 다이카노 가이신(大化の改新)까지의 약 1세기에 걸친 아스카시대는, 중국에서 한역된 경전이나 한국불상을 본받은 외래 불교문화의 섭취 시대이다. 6세기말에는 숭불파崇佛派 소가蘇我에 의해 일본 최초의 본격적 불교 사원인 아스카테라飛鳥寺의 건립이 있었고, 추고기推古期에 들어서면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의 열렬한 불교 장려에 힘입어 중국풍 기와집의 사원건축이 많이 지어졌다.
이러한 사원건축이나 그 내부에 안치된 불상*과 회화*는 중국 북위北魏로부터 동위東魏까지의 미술이나 같은 시대인 남북조(南北朝)시대의 미술이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건축:오늘날 아스카시대의 건축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나 그 유적은 기나이畿內지방을 중심으로 40여 곳에 이른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일본 최초의 본격적 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스카지는 탑을 중심으로 북쪽과 동서에 금당이 있는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이러한 전례는 고구려 청암리淸岩里 폐사지廢寺址에서 볼 수 있어 한국의 가람 형식을 모방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밖에 탑*, 금당, 강당이 남쪽에서부터 일렬로 서는 시텐노지四天王寺식 가람배치도 있는데 이는 아스카테라식보다 보편적인 형식이다.
조각
이 시대의 조각에는 호류지法隆寺의 본존인 석가삼존상을 제작한 도리불사止利佛師와 호류지의 백제관음계(百濟觀音系)의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쇼토쿠 태자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도리불사가 제작한 석가삼존상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옷주름이 좌우 대칭인 7세기 전반의 조각과 공통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도리식 불상은 엄격한 작풍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양팔부터 드리운 천의가 앞뒤로 휘날리는 백제관음상은 부드러운 리듬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 한반도로부터 도래했을 가능성이 있는 고류지廣隆寺의 반가사유상도 있다.
(좌)-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우)-교류지반가사유상
특히 아스카 시대 문화 유산의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광륭사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국보1호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일본인의 자부심이 담긴 유물이다. 그런데 광륭사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일목조의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나무의 재질이 한반도에서 자라는 적송인데다가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거의 닮았다. 도래계(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진)유물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회화, 공예
비단벌레의 겉날개를 투조(透彫) 장식 속에 쭉 깔아서 빛나게 하는 기법으로 그 명칭이 붙은 타마무시노즈시玉蟲廚子와 쇼토쿠 태자의 비(妃) 중 한 사람이었던 귤대낭녀橘大郞女가 태자가 천국에 왕생한 모습을 보고자 화가 야마토 아야노마켄東漢末賢 등에게 초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자수를 놓은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이 아스카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대보장전에 있는 백제관음상은 백제 불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대보장전 백제관음상
불교가 당시 일본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남긴 것은 그 종교적 세계나 교리가 아닌 외적인 모습이었다. 당시 일본은 판자나 띠로 지붕을 엮은 조잡한건물에 살았고 백성은 마루도 없는 움막집에서 지내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기와지붕을 갖춘 거대규모의 사원이라든지 그 안에 모셔진 불상등 여러 불교 예술작품이나 불교의 장엄한 여러 의식등은 지배계급의 권위를 한층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이었따. 또 불교 관계 기술자들뿐아니라 역박사 의박사 악인 등 수많은 사람이 백제를 중심으로 하여 한반도에서 들어와 전파되었다. 이때 대표적 공예품으로는 옥충주자 및 중궁사의 천수국수장등이 유명하다.
옥중추자
중궁사 천수국수장
대외관계
신라와의 관계
대립과 갈등 (7세기 초중반)
649년에는 신라에서 김다수(金多遂)가 왜국에 파견되는 등 왜에 대한 외교 공작도 활발해졌다. 645년에 왜에서 나카노오에 황자(훗날 덴지 천황)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자, 급진 개혁 세력은 당과 그 동맹국 신라를 자국의 중앙집권화를 위한 개혁 모델로 삼아 다이카 개신이라는 정치개혁을 추진하면서 신라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당시 신라의 실력자였던 김춘추도 직접 왜로 건너가 왜 조정과 교섭하면서, 왜의 귀족들에게 "용모가 아름답고 말이 시원시원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647년) 백제를 없애기 위해서는 백제의 오랜 동맹국이었던 왜를 백제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신라로서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백제와 왜를 갈라놓으려는 신라의 외교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백제 계통으로 추정되는 왜의 유수의 호족 소가(蘇我) 일족과 긴밀한 통혼 관계에 있던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게 되는 등의 왜의 내부 사정으로 친백제 경향이 친신라 경향보다 훨씬 우세해진 데에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이 무렵 왜 조정의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당이 왜와는 비교적 사이가 소원했던 고구려가 아닌 전통적인 우호국 백제를 바다 쪽에서 공격할 가능성이 타진되면서 왜는 전통적인 우호 관계였던 중국 왕조(당)와 한반도의 왕조(백제) 사이에 양자택일을 강요당해야 했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신라의 급속한 당풍화가 왜에 불안을 가져왔다는 지적도 있다. 하쿠치(白雉) 2년(651년)에 신라에서 왜에 파견한 사찬 지만(知萬)이 당의 관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불쾌하게' 여긴 왜의 좌대신 코세노 토쿠타(巨勢徳陀子)가 왜의 실질적인 실력자였던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 후의 덴지 천황)에게 신라 정벌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백강 전투와 왜의 접근 (7세기 후반)
660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일본의 동맹국인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어 백제는 멸망하였다. 이 와중에 백제의 옛 장수였던 귀실복신·흑치상지 등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은 신라·당과의 대립을 무릅쓰고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다. 663년, 신라와 당은 수륙협공으로 백제 부흥정부의 수도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기병이 진을 치고 신라군과 맞섰고, 바다에서는 왜에서 온 함선들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대패했다.(이때 백제·왜의 연합군은 당의 수군에 밀려 물러나 있다가 "우리가 먼저 치면 저들은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는 몹시 엉터리같은 작전을 택했다고 한다.) 백강에 집결해 있던 1천 척의 함선 가운데 4백 척이 불탔으며,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그리고 이들 사료를 참조한 《삼국사기》는 이때의 싸움을 두고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당시의 처절했던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백강 전투)
663년 백강전투
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백제의 멸망으로 대거 유입된 난민들을 수용하였다. 또한 당의 침략 위협에 대한 공포로 일본은 오노 성(大野城, 665년) 과 카네다 성(金田城, 667년) 을 축조-여기에 난민들도 참여하였다-하고 방어 전쟁준비를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왜는 신라나 당과의 대립은 깊어졌다. 그러나 또한 한반도의 새로운 패권 세력인 신라와 친해지지 않으면 신라와 당의 연합이 왜국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왜는 서둘러 665년부터 신라와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왜의 중신이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나서서 신라의 문무왕과 함께 신라 조정의 실력자였던 태대각간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당과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라와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었다. 이는 훗날, 원효(元曉)나 의상(義湘) 등의 신라 승려들이 나중에 신라 본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질 수 있는 정치·외교사적 배경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후, 나당전쟁으로 인해 신라와 당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고 신라는 당과의 전쟁위험이 존재하는 동안 후방의 위협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720년까지 교류를 증진하며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성덕왕 2년(703년) 204명에 달하는 일본국 사신을 받아들일 정도[34] 로 성덕왕 초기에는 우호관계에 있었다. 일본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소 소략해 일본 쪽 자료를 보충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양쪽 자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한 세기 동안 신라 사신들이 일본에 39차례나 파견됐다. 같은 기간에 일본 사신들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그 기간에 당나라로 견당사(遣唐使)를 보낸 것은 불과 10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