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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개괄 - 제1장 경제사회의 성립 이전

정신분열초기/역사자료저장소

by 에이구몬 2020. 12. 12.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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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경제사회의 성립 이전

  1. ‘봉건사회’의 성립
    봉건사회의 형성 과정은 어디서나 완만하게 전개되었다. 서유럽에서는 4세기 이후 여러 역사적 사건을 거쳐 약 400년 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거의 8~9세기가 되어서야 성립되었다. 일본의 경우 고대국가 형성기로부터 ‘봉건사회’가 성립될 때까지 약 1,000년의 시간이 걸렸고, 봉건사회로 변화할 핵이 발생한 시기부터 세더라도 400년간은 ‘이행기’였다. 일본의 경우 국가형성기에 채용된 국제가 고대국가로서 가장 완성된 수당제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이었다는 점과 일본 자신이 갖는 아시아 관개농경사회라는 성격으로 인해 정치적 틀 속에는 오랫동안 고대국가적 요소를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고대국가의 요소로 인해 봉건적 지배의 틀이 설정되기까지는 타협과 항쟁이 반복되었다. 일시적으로 안정을 얻는 경우도 있었지만 근본적 해결은 없었고 15~16세기에는 무정부 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그 사이에 국지적으로는 경제사회의 형성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서유럽에서의 봉건사회 형성 과정과는 차이가 있다. 일본에서는 고대국가의 틀이 잔존하는 가운데 전국적 정권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 정권은 그러한 틀 속에서 경제사회의 존재와 대응을 고려해야했다.

  1. 일본에서의 국가형성
    6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일본열도가 국가적 통일의 움직임을 보이고 보편종교로서의 불교를 받아들이고 또 문자를 받아들인 시기였다. 도작수전농경이 도입되어 관개설비가 갖추어지고 야마토지방을 평정한 한 세력에 의해 국가형성이 진행되었다. 당시 중국대륙에서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춘 수당제국으로부터 국제 모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를 일본화시킨 율령제를 틀로 삼아 국가형성을 전개했다. 

국가조직으로서의 율령제는 매우 정교한 국제로서, 강력한 국가권력을 구성하였다. 중앙뿐 아니라 지방에도 국가 지배조직이 형성되어 법리적으로는 도망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이 농업생산에 미친 영향도 매우 커서 율령정부에 의해 수행된 수많은 관개수리시설의 건설과 조리제 같은 계획적 평야지대 개간은 농업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왔다.

  1. 고대국가와 토지제도
    율령제에서 토지제도는 ‘하늘 아래 땅끝 바닷가에 이르기 까지 왕토 아닌 곳이 없다’라고 하여 원칙적으로 이른바 토지공유제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사고에 기초해 토지로부터 수익을 얻는 모든 농민들로부터 세를 거둬들였던 것이다. 이런 공유제 아래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징세하고 관리 할 수 있는 제도로 다이호령에서 확립된 반전수수법을 채용하였다. 이 법은 일본 기나이 지방 혹은 율령정부의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으로 한정되었으며 그것도 9세기가 들어서면 실시가 중지되었다. 

반전수수법은 미흡한 준비와 상층계급과 사사에 지급되었던 토지로 인하여 농민에게 반급될 토지가 부족해지자 붕괴했다. 즉, 일본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일부에서 단기간에만 실시된 토지제도였다. 그러나 이 법이 실시되지 못하였다는 것이 곧 율령제의 붕괴를 의미하는것은 아니다. 토지공유의 원칙은 계속되어 농민은 공조제역의 부담을 져야했다. 

  1. 장원의 성립
    봉건중앙귀족과 지방호족등 상층부의 토지 사유열은 왜 일어났을까. 당시 일본은 원시적 상태를 벗어나 문화적 체험을 하고 있었다. 한정된 계층이었지만 도시생활이 시작되고 문자의 사용, 사사의 당탑건립과 함께 문학이 성립되어 시가관현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정신문화의 주요 담당자는 역시 중앙귀족층이었는데 그들이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한 물질적 기반이 요구 되었다. 그러나 율령에 의해 정해진 수입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수입 수단이 없을 경우 ,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토지 사유 외에는 없었다. 더욱이 일본의 경우 고대국가의 전제적 지배는 고대 오리엔트 사회만큼 강력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모든 권력이 한사람의 왕에게 집중되는 형태는 아니었다. 천황보다는 실질적으로 천황을 옹립하는 귀족세력들에게 있었다. 후지와라 일가, 셋칸가에 의해 독점되기도 했으나 중급 귀족의 수령층이 일정하게 실권을 쥐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귀족과 사사에 의한 토지사유가 율령제의 원리인 공유제와는 엄연히 모순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토지사유를 우리들은 ‘장’ 또는 ‘장원’이라고 한다. 

  2. 장원의 구조
    장원은 용어 자체로서도 역사가 유구하다. 그러나 메이지 이후 일본 역사가들은 유럽사의 Manor, Grundherrschaft에 장원이라는 똑같은 번역어를 사용함으로써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유럽사의 장원은 일본사에서 보이는 장원과 성격이 크게 다른 제도였다. 

일본의 장원제는 성립 사정부터 율령제라는 고대국가의 틀을 한편에서 필요로 하였다. 율령제와 장원제는 상호 모순되면서도 장원제가 율령제를 필요로 한다는 보완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유럽의 경우 장원제는 봉건적 토지제도였고 장원제와 봉건제는 하나의 사회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때 사용하는 용어법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봉건제와 장원제는 결코 하나의 사회를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다. 

둘째, 유럽의 경우 장원은 하나의 영지 지배였고 영주는 유일한 주권자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초기의 자간지계 장원을 제외한다면 토지에서 나오는 '일정 비율의 공조를 획득할 권리'가 영주권의 내용이었고, 이를 영지지배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영주와 농민의 관계에서도 차이가 있었는데, 유럽의 경우 농민 대부분이 부자유 신분의 농노였지만 일본에서는 자유민 혹은 부자유민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일본의 장원제 하에서는 장원영주와 농민의 관계가 인신적 지배에서 멀어져 갔던 것이다. 

  1. 장원의 계열
    장원은 그 성립사정에 따라 3개 계열로 분류할 수 있다.

    • 자간지계 장원: 간전사재법에 따라 8~9세기 경 사사에 의한 대규모 개간을 성립하였다.  도다이지에 의한 호쿠리쿠 지방 개발은 그 예이다. 이는 미개척지를 대규모로 에워싸서 자재와 노동력을 투입하여 개간하는 것으로 노동력 확보가 가장 큰 문제였다. 부랑자를 정착시키는 경우가 있어 특히 영주권이 상대적으로 강력하였다. 

    • 잡역면계장원: 원래 사사에는 정세로서 공민이 국가에 바치는 과역의  일부가 부여되고 있었다. 일단 고쿠가가 징수하였다가 다시 사사에 급부하는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사사가 직접 잡역을 징수하는 제도로 바뀌었다. 11~12세기에 이르면 잡역을 징수하는 객체로서 특정 토지가 지정되어 여기에 장원이 성립하게 되었다.

    • 기진지계 장원: 재지의 토호가 갖고있던 연공과역의 징수권을 중앙귀족에게 기진하면서 발생했다. 이 경우 기진을 할 때 국사급의 중간 개재자가 존재했으며, 또한 이 호족들이 불법인 기진을 행하는 것을 율령체계에서 인정하기 위해 장원 영주권이 몇개 층에 분할 소유 되었다. 세속령이 많았으며 11세기 말부터 12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상의 세 계열의 장원은 현실에서는 혼재하거나 변형되어 확실한 구분은 없었다. 더구나 성격상의 차이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1. 장원화의 진행
    장원화는 교토와 나라주변에서 상당히 진행되었다. 11세기 이가지방에서는 경지의 약 2/3가 장원에 속하였고 12세기 초 기이지방의 북부 6개 군에서는 80%이상이 장원화 되었으며, 다카노야마에 가까운 최북단 2군은 군 전체가 장원화 되었다. 이처럼 기나이와 그 주변에서는 장원화가 널리 진행 되었다. 

장원내부에서 종적인 영주권의 발전은 불윤조화로 표면화 되었다. 원래 율령제 하에서 토지는 윤조지와 불윤조지로 구분되고 사전과 직전등은 후자에 속했다. 토지사유의 의의가 중요해지면서 위전과 공전등도 불윤조가 되었는데 9세기 중엽부터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 불윤조지화 시킬 수 있는 제도가 발생했다. 

장원이 불윤조지가 되는 것은 국제상으로 장원이 질적으로 변화하였음 의미한다. 율령정부는 그만큼의 재정수입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윤조지화는 율령정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었다. 더욱이 이것이 율령정부의 고급관료이기도 한 귀족층과 사사에 의해 합법적인 수단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장원제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1~12세기에는, 율령제와 장원제의 관계는 서로 모순된 토지제도 원리이면서도 둘다 중앙귀족에 의해 운영되고 소유되는 기이한 관계였다. 헤이안 조의 귀족은 이러한 모순되고 불안정한 존재였고 그 위에서 왕조문화가 개화하였다. 

  1. 장원영주권의 성격
    장원제란 영주권을 통해 국가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 및 농민지배의 권한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는 장원의 설립이 율령의 합법적 절차를 거친 것이라는 점 이상으로 장원제의 성격을 강하게 규정하게 되었다. 

장원영주가 장원에서 연공을 취하는 권리는 율령제 국가가 갖고 있었던 징세권이 변형된 것으로 그것은 소령을 형성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연공을 징수하기 위해서는 국내질서의 유지가 절대불가결한 전제였다. 이 임무는 전적으로 율령정부에게 맡겨져 있었다. 즉 장원영주는 연공 징수와 관련해서는 어떤 강제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장원제가 율령제와 모순되면서도 한편으론 공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조건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모순된 공존은 다이카 개신이후 전국시대의 무정부 상태에 이르기까지 약 900년에 걸쳐 일본 정치지배의 틀이 되었다. 

  1. 무가정권의 성립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이후 이 같은 틀을 이용하는 세력으로서 무가 권력이 새롭게 가세하였다. 율령정권의 정치력 약화와 함께 지방의 재지토호층이 진출하게 되자 장원을 둘러싼 사회 각 세력간의 갈등은 더욱 복잡해졌다. 하지만 가마쿠라, 무로마치의 양 막부권력은 기존 시스템을 대신할 새로운 지배시스템을 창출해 내지 못 했다. 결국 전국기의 무정부 상태를 거쳐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도쿠가와 정권에 의해 율령제와 장원제는 폐지 된다. 

11~12세기 장원제 전성기에는 율령정부의 재정적 기반이 붕괴되고 장원은 불윤조의 특권만이 아니라 불입의 권리까지 획득하였고 이를 확대해석하여 경찰권의 개입을 배제하는 권리까지 갖게 되었다. 장원에는 국가 권력이 미치지 않는 일종의 진공지대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직접적인 힘으로서 무력에 의존하는 세력이 형성되었다. 미나모토와 다이라의 양대세력이었고 동국에 기반을 두었던 미나모토에 의해 하나의 정치권력이 탄생했다.  

  1. 가마쿠라 막부
    가마쿠라 정권의 등장을 경제사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막부의 성립이 곧바로 사회구조상의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장원에는 본래의 장원영주가 설치한 장원 관리자가 있었고, 이들은 장원의 관리 운영과 연공의 징수를 담당했다. 새롭게 등장한 무가세력은 유력한 농민이나 장원 관리자 출신이 많았고, 그 중에는 출신 장원의 지토로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와 율령 정권의 관계도 결코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었다. 막부가 소유한 무력을 사용할 경우 율령정권을 군사적으로 타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조큐의 난 때도 율령정권을 결코 멸망시킬 수 없었다. 이는 막부 자체가 단독으로 국정을 담당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막부의 구성을 보더라도 각 기관은 쇼군 가의 사적인 가산 운영기관이었다. 유일한 법전이었던 조에이 식목은 율령에 대항히기 위해 편찬된 무가의 법이었지만 율령에 비해 간략하고 적용범위도 한정되었다. 그러니 이것을 국법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막부는 율령정부가 상실했던 치안유지능력을 자신의 무력으로 대행하였고, 상호 보완적 관계였다. 특히 서일본에는 세력에 복종하지 않는 무사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과 쇼군의 관계는 몽골 침입때를 제외하곤 거의 없었다.

이처럼 가마쿠라 막부의 성격은 부분적이고 율령정권 없이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강고한 것이 아니었다. 이를 봉건정권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 지토
    지토는 장원에서 무력과 경찰권을 거의 독점했고 더 이상 그들의 적수가 없음을 알아차린다. 지토들은 문화를 즐길 기회가 많아지면서 더 많은 수익을 원하게 되었고 장원 연공이 우선 획득의 대상이 되었다. 장원영주들은 이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직접 관리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이미 대항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영주에게 연공은 유일한 수입원이었기에 지토의 약탈은 바로 생활의 파탄을 의미했다. 영주는 막부에게 호소를 하게 되고 소송을 맡은 막부는 이를 재정하였다. 그 결과로 지토우케라는 타협적 제도가 생겨났다. 이는 장원영주에 대해 일정한 연공을 지토가 청부받고 나머지는 자신이 가지는 제도다. 쌍방의 권리를 서로 인정한 것으로 가마쿠라 시대에는 널리 시행되었다. 그러나 지토가 자신의 권한을 더욱 확대하려 화여라는 형태로 구영주와 지토사이에 장원토지를 이분하거나 혹은 막부의 재정을 거쳐 하지중분이라는 형태로 이분하게 되었다. 이후 무로마치 시대가 되면 슈고에 의한 슈고우케로부터 반제등의 형태를 취하면서 무가의 장원침략이 진행되어 갔다. 

  2. 재지영주의 지배
    지토 또는 슈고의 영주화는 장원뿐 아니라 고쿠가령에서도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토 층 또는 동등한 지방호족들에 의한 재지 영주 지배의 성립이 장원제의 한계 부분에서 발생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지배가 전국적으로 확대 된다면 이를 새로운 지배의 틀로 간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마쿠라 시대는 아직 그 수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여전히 율령제와 장원제가 잔존하고 있었으며 막부 그 자체도 봉건적이지 않았다. 

  3. 농민의 상태
    그러면 반전수수제로부터 장원제에 이르기까지 농민의 상태는 어떠했을까. 장원영주는 일종의 기생충 같은 지대생활자였고 농민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생산이나 농민의 상태에 대한 자료는 농민 스스로에게 의존해야하는데 당시 농민은 식자능력을 거의 갖추고 있지 못했기에 남아있는 기록은 전혀 없다.
    반전제 하에서는 호적이 편성되고 이는 현재까지 전해진다. 당시 농민가족은 대규모로서 동거친족과 노비를 포함하여 20~30명인 규모가 많았다. 헤이안 말기가 되면 표준적 농민을 묘슈(名主)라고 부르게 되었다. 개간이나 매입을 통해 특정 농민가족이 경작권과 점유권을 갖게 되면 그 토지에 농민의 이름을 붙였기에 묘덴(名田)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묘슈는 그 주인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더욱이 병농 미분리 상황에서는 무사적 요소가 강한 농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묘슈에 의해 영위되는 농경을 묘덴 경영이라고 부르고 직계가족 주변의 방계가족이나 예속노동력을 이용하는 경영을 통해 경작하고 있었다는 것이 통상적 견해다. 그리고 묘슈에게 토지를 빌려서 경작하는 작인, 그리고 작인으로부터 다시 땅을 빌리는 하작인도 있었다. 

이러한 농민가족 몇 호가 모여서 하나의 촌락을 형성하였다. 촌락은 농업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성립한 것과 개간을 통해 성립한 것등 그 기원이 다양하였고 규모도 일정치 않았다. 

  1. 장원제 하의 경제
    장원제 사회에서 최대의 재화는 역시 장원연공이다. 이는 농민이 생산하고, 거의 대부분이 생산물의 형태로 영주에게로 운송되었다.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영주층의 일상생활은 전적이라 해도 좋을만큼 물납연공에 의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일종의 농산물의 직접소비 상태를 상정해볼 수 있다. 

이처럼 생활필수품을 물납연공에 의지하고 있었기에 그 운송이 문제였다. 운송수단이 한정되어있던 당시 상황에서는 현물연공이 안전하게 규정대로 운반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치안유지가 필요 했으며, 연공 운송의 지연과 정체는 국법으로 처리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영주가 아닌 율령정부의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점에서도 장원영주로서는 율령제가 굳건히 존재해야 했다. 운송과 관련해서는 수운 전문업자가 출연하여 수운이 편리한 곳에 이들의 거점이 생성되었다.

  1. 생산목적
    농민의 생산목적은 연공과 자급이라는 한계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이 두가지는 모두 강제적이다. 연공 미납은 처벌대상이고 자급은 생존의 문제이기에 강제적이다. 강제에 의해 생산의 동기가 부여될 경우 노동을 고역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높은 생산력을 실현하려고 한다든가 하는 힘은 작용하지 않고 농민은 생산에 대해 수동적으로만 관계하게 된다. 

덧붙여, 영주 측에서도 생산량 증대를 위한 노력은 없었다. 장원영주는 자기 장원의 생산에 대해서는 현상유지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영주가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노력할 유인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율령정부 내부에서 보다 좋은 위치를 차지하여 더 많은 장원을 획득하는 방법을 추구했다. 설사 영주가 농업을 개량하려해도 행사할 수 있는 영주권의 범위란 관습적으로 연공을 취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생산자 측 혹은 지배자 측에서도 생산량에 대한 증대의 의욕이 없었기 때문에 생산수준은 낮은 상태로 장기간에 걸쳐 정체되었다고 볼 수 있다. 

  1. 경제사회의 미성립
    이렇게 경제활동이 활발하지 못한 상태, 생산기술의 정체적인 성격이야말로 장원제 하에서의 생산을 특징짓는 기본적인 성격이었다. 인구와 생산총량도의 변동도 단기적으로는 어떻든 장기적으로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생활수준은 낮아서 겨우 생존수준에 근접한 정도였다고 생각되며 특히 예속적인 지위에 있었던 나고, 후다이, 게닌들의 생활수준은 더 낮았을 것이다. 

  2. 연공의 성격
    장원 영주는 농민들로부터의 연공을 전적으로 자신의 사적소비룰 충족시키기 위해 거둬들였다. 그러한 한, 연공은 영주의 가산적 사경제의 틀 속에서 일방적으로 이동하는 재화의 흐름이었다. 따라서 연공은 일종의 사적지대(rent)였지 조세(tax)는 아니었다. 

고대국가제도에서의 tax가 rent로 전환한 것이 장원제이고 이것이 이 시기 역사에 내재된 문제였다. 이는 확실히 고대국가적인 원리에서 본다면 모순이었다.

  1. 장원경제의 존속조건
    장원제는 이처럼 모순에 가득찬 불안정한 틀임에도 천년 가까이 생명력을 유지했다. 표면적 정권교체는 일종의 왕조교체극에 지나지 않았고 틀 자체의 변화는 아니었다고 한다면 이러한 불안정한 틀이 장기간에 걸쳐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실마리로 이 시기 대외관계를 보고자 한다. 수, 당 시대의 일본은 거의 일방적으로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0세기에는 한반도의 통일이 있었지만 일본과의 관계는 소원했다. 대략 이 시기부터 일본은 대외관계에 따른 긴장으로부터 벗어나 일본의 역사는 오로지 일본 내에서의 진행에 맡기게 된다. 몇가지 예외를 제외한다면 일본은 거의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외국으로부터의 위협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예외로는 가마쿠라 막부 시기 몽골의 침략이 있다. 

다음으로 고려 할 것은 경제적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장원시대는 경제활동이 극도로 부진하고, 거기에 종사하여 경제적 힘을 얻는 자가 매우 한정되며, 더군다나 그들이 이미 정치권력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경제와 연결된 사회변동은 발생하지 않는 시대였다. 당시 전개되었던 역사는 일종의 왕조교체극 이상은 아니었다. 

  1. 무로마치 시대
    남북조 내란기를 거쳐 무로마치 시대로 진입하는 과정도 같은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 있다. 무로마치 막부는 전국적인 정권으로서의 집권력을 결여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 이르면 지방의 지배권력이 대두하게 된다. 막부와 직접적 연관을 갖는 슈고는 임지 내 무사층과 주종관계를 맺고, 임지 내의 장원을 전시대의 지토가 다스렸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침략해 나갔다. 이리하여 슈고영국제가 전개 되고 슈고들은 슈고 다이묘로 불리게 된다. 이 다이묘는 에도 시대의 다이묘와는 달리 소령을 형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율령제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배 타입으로서는 이 계열의 최종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중앙권력을 약체화시켜 무정부 상태의 도래를 용이하게 했다는 의미에서 다음 시대로의 과도기적 성격을 갖지만,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1. 제 1장의 요점
    고대 중국으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국가를 형성한 일본은 수당제국의 제도를 수용해 율령국가를 형성하였다. 토지를 공유화 하고 징세를 철저히 하기 위해 반전 수수제를 실행하려했지만 정착시키지는 못했다. 더욱이 약한 왕권과 귀족층의 강한 토지사유욕 때문에 토지공유제와는 상반된 장원제라는 토지제도를 성립시켰다. 이는 율령제의 폐지는 아니었고 두 제도의 조합이 제도화 된 것이다.

무가정권의 성립도 그 자체로서는 전혀 새로운 틀로의 이행이 아니었다. 다만 기생적인 장원영주와는 다른 재지영주 지배의 성립은 다음 시대로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장원제 하의 경제에서는 영주층이 연공징수권을 국가로부터 계승한 형태로 현물연공을 직접 소비했기에 시장의 성립이 매우 한정되었다. 농민의 생산목적 역시 자급과 연공이라는 강제에 의한 것으로 한정되어 생산에 대한 적극적 개량이 없었다. 즉, 경제적 인센티브가 없었던 것이다. 영주 역시 생산량 증대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시도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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